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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취 5년차다. 바쁜 서울생활에 강제 '1일 1식'을 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요리를 꽤 좋아하는 편이라 한때는 아침에 일어나면 국을 끓일 정도였다. 아침에 국을 먹는 것은 꼭 국 있는 식사를 차려 주신 어머니 때문에 든 습관이었다. 하지만 나 혼자 먹기 위해 밥을 하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라 곧 관두었다.

<찬이네> '대학생 반찬 나눔 공동체'(아래 찬이네)는 그런 '필요'에 의해 시작됐다.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운영진은 '9월 활동 개시'를 목표로 지난 여름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대학생과 독거노인의 먹거리 해결

요리에는 분명 '규모의 경제'가 있다. 한 명이 한 끼 분의 국을 끓이나 다섯 끼 분의 국을 끓이나 드는 품은 비슷하다. 한 명이 요리하는 동안에 나머지 네 명은 쉴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사람이 모이면 많은 양을 기본 단위로 파는 시장에서 장을 볼 수 있다. 찬이네 사람들은 모두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주변에 사는 자취생들이다. 청량리 청과물 도매시장과 제기 약령시장을 잇는 경동시장의 신선하고도 값 싼 식재료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가난한 자취생들도 같은 금액으로 보다 양질의 식사를 할 수 있게 됐다. 거기에다 더 많은 양의 요리를 할 수 있는 여유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끼리 요리해서 나누어 먹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어려운 분들과 함께 나누자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무료급식사업을 하는 '밥퍼'를 통해 청량리 쪽방촌의 독거노인분들을 소개받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동대문구 휘경동 주민 간의 커뮤니티 형성

동대문구 경동시장의 상인들과 대학생들
 동대문구 경동시장의 상인들과 대학생들
ⓒ 정환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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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주민등록이 돼있는 엄연한 휘경동 주민이다. 다른 자취생들도 대부분 전농동, 휘경동, 좀 멀다 싶으면 장안동 주민이다.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을 이 동네에서 살았다. 하지만 자취생들과 기존 휘경동 일대의 주민들은 잘 융화되지 않는다. '동네 주민'이라는 범주에는 자취하며 지내는 대학생들은 속하지 않는 듯하다.

나는 경남 마산에서만 십오 년 이상을 살았다. 아파트 단지에 살아 동네 주민들을 다 꿰고 있진 않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들 중 꽤 많은 이를 알았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기억했다. 물론 같은 동에 사는 이웃들과는 꼬박꼬박 인사하고 지냈다.

청량리·회기 일대 주민들은 서울시립대 캠퍼스에서 이따금씩 산책을 한다. 분명 같은 이웃인데 왜 우리는 섞일 수 없는 것일까. 우리가 동네 주민들과 어울리면서 뜨내기가 아닌 마을 사람처럼 정 붙이고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적하고 심심한 노인분들께 우리 청년들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으면 더더욱 좋겠다 생각했다. 청년들, 지역 주민, 독거노인 이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뜻에서 우리는 단체 이름을 '찬이네'로 정했다. 요리를 할 장소도 동네 경로당 중에서 물색하기로 했다.

찬이네와의 4개월

대학생과 지역 주민들이 다함께 요리
 대학생과 지역 주민들이 다함께 요리
ⓒ 정환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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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이네 활동은 꽤 순조로웠다. 우선 반찬을 만들 장소를 물색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다행히 휘경동 수복경로당의 할머니들께서 "대학생들이 좋은 일 한다"며 자리를 내어 주셨다. 그렇게 매주 토요일 오후를 경로당 할머님들과 보내게 됐다. 할머니들은 미숙한 자취생들의 요리를 도와주시는 일등 선생님이었다.

또 다른 행운은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찬이네는 운영진 5명에 회원이 13명을 더해 총 18명이 있었는데 다들 책임감이 강하고 조직에 잘 융화되는, 유머감각이 뛰어난 친구들이었다. 토요일이라 다들 바쁘고 늦잠 잘 만도 한데,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참석했다. 다들 힘든 일을 도맡아 하려고 했고 성격도 쾌활해서 정말 웃으면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찬이네 18명을 윗마을·아랫마을 9명씩 두 팀으로 나눴다(모두 서울시립대 학생이었다). 각 팀이 번갈아 가며 일 주일에 한 번씩 반찬을 만들었고, 나머지 회원들은 매주 반찬을 받았다. 일 주일에 배달되는 반찬은 3가지. 그렇게 해서 8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11번에 걸쳐 반찬을 받았다. 가입비 1만원(이중 5천원은 보증금)에 추가 회비 4만원, 총 5만원으로 3개월 남짓한 기간의 반찬을 해결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피둥피둥' 살이 쪄갔다. 운영진을 포함한 회원들은 한 달에 2만 원씩 회비를 냈다. 그 대가로 질 좋은 반찬들을 집에 쌓아두고 먹을 수 있었다. 거기다 서울시립대 산학협력단 '따뜻한 서울만들기'와 서울시 '이웃 만들기' 사업 공모에 지원해 활동비도 지원 받았다.

반찬은 원활한 재료 수급을 위해 최대한 제철 메뉴로 정했다. 연근조림, 느타리 버섯 볶음, 삼치 조림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였다. 장조림, 떡갈비, 멸치 볶음, 감자채 볶음, 부추 겉절이, 제육 볶음 등을 만들었다. 회원들의 요리 실력도 쑥쑥 늘었다. 주로 집에서 공부하는 수험생인 나는 저렴하고 편하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청량리 성심병원 뒷편 쪽방촌 초입 골목에서 친구들이 배달할 반찬을 들고 있다.
 청량리 성심병원 뒷편 쪽방촌 초입 골목에서 친구들이 배달할 반찬을 들고 있다.
ⓒ 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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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쪽방촌은 사실 많이 무서웠다. 들어서니 붉은 조명이 우릴 반겼다. 가을에는 해가 져서 사방이 캄캄했다. 여인숙에는 지린내가 났다. 독거 노인분들은 그곳에서 종일 누워 티브이를 보며 하루를 보내셨다. 내 원룸의 3분의 1정도 되는 아주 협소한 공간이었다.

어떤 어르신은 반찬을 드렸지만 냉장고가 없어 바닥에 그냥 두셨다. 우리는 음식이 상할 까봐 노심초사 했다. 반찬을 가져다 드려도 어떤 분은 시큰둥하거나 오히려 역정을 내셨다. 물론 "아주 감사하다"며 "먹는 것은 쉽지만 만드는 것은 어려운데 그것을 몰라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시는 어르신도 계셨다. 물질적 어려움이 마음을 꽁꽁 얼어 버리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기말고사 기간 즈음 해서 우리 활동은 일단락됐다. 그 후에 서울시립대학교 산학협력단 '따뜻한 서울 만들기' 사업 공모에서 3등상을 타기도 했다. 친구들과 반찬을 함께 만들던 추억, 동네에서 마주치면 인사할 수 있는 할머니들, 노인 빈곤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들이 내 마음에 남았다. 우리가 한 일들이 서울의 온도를 조금이나마 더 따뜻하게 높였을까?


태그:#정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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