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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 중국 여행은 1997년 봄이었다. 마침 영국령이던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던 해이기도 하다. 북방 항공 기내에서는 승무원들이 기념 메달을 승객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중국은 그렇게 청나라 말 서구 열강들에게 당한 흔적을 말끔히 지워내며 21세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가 이뤄낸 지금의 중국이 있기까지 잡음이 끊이지 않았지만, 중국은 개의치 않았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이른바 '흑묘백묘론'으로 대변되는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희생과 인내는 뚜렷한 목표를 전제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2천 년 전의 전략가 '장량(장자방)'을 이야기하는 신간, 책 <장량>을 읽으면서 대전략가의 밑바닥에는 희생과 인내가 있음을 알게 됐다.

 

"덩샤오핑을 이었던 장쩌민은 중국의 실력을 이제는 밖으로 드러낼 때가 되었다고 해서 '유소작위(有所作爲)'를, 후진타오는 중국을 우뚝 드러나게 하되 주변국의 질시를 받지 않겠다는 뜻으로 '화평굴기(和平屈起)'를 시진핑은 중국이 이제 주도적으로 세계의 일을 감당하겠다는 자신감을 피력해 '주동작위(主動作爲)'를 외교정책의 줏대로 내세웠다."(p. 68)

 

자객에서 대전략가로

 

천하를 덮을 만큼 용기가 있는 자는(천하유대용자 天下有大勇者)

갑자기 어떤 일이 닥쳐도 놀라지 않으며(졸연임지이불경 卒然臨之而不驚)

까닭 없이 해를 당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무고가지이불노 無故加之而不怒)

이는, 그의 마음에 품은 바가 매우 크고(차기소협지자심대 此其所挾持者甚大)

뜻이 심히 원대하기 때문이다(而其志甚遠也)

 

이 글은 소동파의 <유후론>에 있는 구절인데, 천안함 침몰 사건 당시 추이톈카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중국을 방문했던 천영우 외교통상부 2차관에게 액자에 담아 선물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구절이라고 한다. '유후'는 장량을 일컫는다. 평생 자신의 주군이었던 한고조 유방에게 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BC 221년)하기 전, 한(韓)나라를 멸했는데 장량은 이 한(韓國)나라 출신이었다. 조부와 부친이 모두 한나라의 상공을 지냈으므로 장량은 나라가 망한 책임이 자신의 가계에도 있다고 판단하고 진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무려 13년 동안 준비한 거사는 결국 실패했다.

 

한 노인으로부터 <태공병법>이라는 책을 얻게 된 장량은 공부에 매진했다. 복수심으로 불타던 청년이 대전략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는 대목이다. 이렇게 <태공병법>을 읊조린 지 10년만에 장량은 유방을 만나게 된다. 이성계의 책사이자 동지였던 정도전이 술자리에서 "유방이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유방을 쓴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유방은 장량이 선택한 주군이었던 것이다.

 

"민심을 얻어야 하는 것의 중요성과 겸손해야 함을 가르쳐 줬는데도, 그 깊은 뜻을 모르고 그것을 단지 '전략'과 '전술'로만 이해한 학생을 어떻게 더 가르칠 수 있겠어."(p.763)

 

팽성 전투에서 유방이 항우에게 패한 원인을 설명하는 말이다. 항우와의 일전이 있기 전 유방은 크게 불어난 군대와 금은보화, 미녀들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것이 패배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박수칠 때 떠나라

 

한나라 6년, 정월에 공신들에게 상을 내려 봉지(땅)를 주었는데, 고조 유방은 "군대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내어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한 것은 자방의 공이다. 스스로 제나라 삼만 호를 골라라"며 장량을 치하한다. 하지만 장량은 말한다.

 

"처음 신이 하비에서 일어났을 때 황상과 유현에서 만났는데, 이는 하늘이 신을 폐하께 주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신의 계책을 쓰셨고, 다행히 때때로 들어맞았습니다. 신은 유현에 봉해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삼만 호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로써 장량은 유후가 되었다. 10배도 더 넓은 땅 대신 장량이 유방을 처음 만났던 유현이라는 땅을 선택한 것은 유방에게 초심을 상기하게하고, 다른 장군들의 반발도 잠재우며, 자존심을 지키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노린 묘수였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홍콩이 반환된 지 20년도 채 안됐지만, 중국은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며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국이 됐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혈맹임을 강조할 때 후진타오는 '한국은 도자기 판매점에서 쿵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국으로 수출은 제일 많이 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미국 편을 드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명심해야 한다. 시진핑이 주도적으로 세계의 일을 감당하겠다며 자신의 시대에 주동작위(主動作爲)를 내세웠다는 사실을.

덧붙이는 글 | <장량> 이양호 지음, 리강 그림, 평사리, 2015년 3월 27일


장량 : 환골탈태, 중원을 통일하다 - 사기

이양호 지음, 리강 그림, 평사리(2015)


태그:#장량, #장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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