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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상 보리에 관한 첫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온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이 부여에서 남하할 때 그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비둘기목에 보리씨를 기탁하여 보냈다고 한다. 어디 가서든 굶지 말라는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보리는 이렇게 남쪽으로 내려온다. 우리나라에서 보리가 전래된 것은 늦어도 B. C. 1세기경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도 고구려와 신라에 간혹 우박이 내려, 콩과 보리를 재배하던 농민들의 피해가 컸다는 기록이 보인다. 늦어도 3세기 전에 남쪽 신라에까지 보리가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리는 삼국시대 이래 우리 겨레와 삶의 애환을 함께 한 친구다.

이수진 작가 작품 호랑이의 과유불급
▲ 맥간공예로 만든 호랑이 이수진 작가 작품 호랑이의 과유불급
ⓒ 하도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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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대를 잡듯이 마음을 잘 잡으면...

<미린다왕문경>에는 "뜻의 작용은 어떻게 하여 움켜쥠을 특징으로 하고, 지혜는 어떻게 하려 끊어버림을 특징으로 합니까?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라는 왕의 질문에 답한 비구(比丘, 불교승) 나가세나(那先)의 말에 보리가 등장한다.

"당신은 보리를 베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보리를 어떻게 벱니까?"
"왼손으로 보릿대를 움켜잡고 오른 손으로 낫을 들어 보리를 벱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출가자는 뜻의 작용에 의해 자기 마음을 움켜잡고 지혜에 의해 자기의 번뇌를 끊어버립니다."


보릿대를 잡듯이 자기 마음을 잘 잡으라는 뜻이니 보리는 우리 삶을 수행처럼 생각하는 이들의 도반이기도 하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보리(菩提)라고도 한다.

엄동설한에도 푸르른 생명력을 잃지 않는 보리

수필가이자 영문학자인 한흑구(본명 한세광(韓世光))는 수필집 <동해산문>에 실린 작품 <보리>에서 엄동설한에도 푸르른 생명력을 잃지 않는 보리를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사명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인 양 기도를 드린다"라고 찬미한다. 겨울의 추위를 견디면서 생명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봄을 맞아 결실을 맺는 보리를 기도하는 성자에 비유한 이 작품의 모티브도 보리(菩提)가 아니었을까?

우리 전통 무용 가운데 보릿대춤이 있다. 전라도 지방의 허튼춤으로, 뻣뻣한 춤동작을 보릿대에 비유한 것이다. 손목과 팔목 같은 뼈의 관절만 부분적으로 움직여서 추는 춤으로, 일종의 '입춤(立-)'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즉흥적으로 추는 서민적인 춤이 바로 이 보릿대춤이다. 보릿대로 말이나 광대, 피리 그리고 인형을 만들던 우리 전통놀이도 있다. 이와 같이 깨달음을 은유하기도 하는 보리는 '보릿고개'라는 말처럼 매우 힘겨웠지만 이젠 향수로 우리에게 자리잡고 있다.

이수진작가의 맥간공예 작품
▲ 맥간공예 인어 이수진작가의 맥간공예 작품
ⓒ 하도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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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대의 화려한 외출, 맥간공예

그런 보리가 요즘 '화려한 외출'을 시도하고 있다. 아무런 쓸모도 없을 것처럼 보였던 보릿대의 변신이기에 더욱 놀랍다. 마치 자개와 같은 빛깔을 내는 맥간공예의 재료는 다름 아닌 보리다. 전통적인 목칠공예기법과 현대적인 모자이크 기법이라는 시대를 초월한 미술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보릿대 고유의 결을 이용하여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붙여 입체적인 느낌도 살릴 수 있다. 결이 엇갈리는 곳에서 빛이 굴절되면서 음영의 차이를 느낄 수 있어 앞으로의 무한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보릿대의 '화려하면서도 편안한 변신'이 기대되는 부분이다.

이 맥간공예 작품들은 고급스럽게 보여서 만드는 과정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수많은 주부 작가들이 있는 것으로 봐서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친근한 소재로 쉽게 만들 수 있는 공예도 드물다는 게 '맥간공예(麥稈工藝)'의 수석 전수자 이수진(43) 작가의 설명이다.

정겨운 농촌의 풍경을 간직한 아름다운 보리와 같은 삶을 살아온 그녀는 맥간공예연구원 보리사모회를 만들어 매년 전시회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 2014년에는 NGO 나마스떼코리아의 후원회원인 이 작가의 무료강습과 재료 기부 등으로 네팔 현지 봉사활동을 떠나기도 했다. 당시 이 작가는 회원들, 네팔 어린이들과 함께 맥간공예로 거울을 만들기도 했다.

삶을 예술로 승화시켜 받은 아세아미술상대상

작품전시회에서 이수진 작가
▲ 이수진 작가 사진 작품전시회에서 이수진 작가
ⓒ 하도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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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는 매일 보릿대를 손에 움켜잡고 산다. 삼성전자에 근무하다 맥간 동호회에서 취미삼아 보리 줄기를 만지다가 그 매력에 흠뻑 빠져 퇴사한 후 무려 23년째 마음을 잡듯이 보리줄기를 잡고 한 길을 걸어온 그녀다.

외길을 걷던 그녀가 한국 예술 평론가 협의회 선정 특별 예술가상(전통·연희, 2012), 한·중·일 문화협력 미술제 대상(2013)에 이어 올해에는 드디어 2015 아세아미술상대상의 영예를 거머쥐게 되었다.

지난 8일 서울시립 경희궁미술관에서 시작된 그녀의 초대전은 오늘 13일까지 계속된다. 그녀가 보릿대를 거머쥐고 번뇌를 끊으며 자신의 삶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시켰는지 흥미진진하다.

덧붙이는 글 | 아세아미술상대상은 한국문화예술연구회(회장 강신웅)와 아세아문화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한국국제문화협회가 후원하는 43년간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한 초대전이다. 중국, 홍콩, 인니, 일본, 마카오, 말레이사아,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 태국, 베트남 등의 저명작가를 한국에 특별 초청하여 국내 작가와 상호의견 교환 및 친선을 도모해 왔다.

이 기사는 <미디어붓다>에도 게재됐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작성한 기사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수진, #맥간공예, #아세아미술상대상, #보리, #보릿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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