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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요즈음 어떠하십니까〉
▲ 책겉표지 〈선생님, 요즈음 어떠하십니까〉
ⓒ 양철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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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나 엽서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보화처럼 그리운 시절입니다.

어쩌다 그것들을 한 장 찾아내는 날이면 그야말로 하루 종일 행복한 웃음을 짓게 됩니다. 아련한 옛 추억은 물론이요, 그 시절의 살가운 모습들을 한 올 한 올 건져 올릴 수 있기 때문이죠.

군 입대해서 여고 후배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었죠. 첫사랑을 이어나갈 마음이었지만,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선임병을 대신해 어느 여고생의 위문편지에 답을 한 일도 있었죠.

물론 다른 속내를 내비치기 위한 편지였습니다. 늦깎이 대학 시절엔 전주에서 진도에 사는 아가씨한테 편지를 보냈었죠. 맞선 본 관계를 지속하려는 심사였는데 그마저도 길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통스러운 것은 이런 가난한 이들의 슬픈 사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버림받은 사람들을 착취하며 이용해 먹는 상대방 족속들에 대한 분노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억울하게 서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치하는 이들, 종교 지도자라는 이들, 학자라는 이들, 애국자라는 이들은 모이면 돼먹지 않는 비현실적인 농지거리만 하는지 화가 안 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21쪽, 권정생)

"사실 이번에 권 선생님 아프시단 소문 듣고, 모두 걱정하여 이번만은 권 선생 자신의 생각대로 둘 수 없으니 어디 요양원에 가시도록 해야 한다고 의논했지요. 대구나 목포로 말입니다."(323쪽, 이오덕)

이는 이오덕과 권정생의〈선생님, 요즈음 어떠하십니까〉에 나오는 편지 내용이에요. 1973년 1월 18일, 이오덕 선생이 일직교회 문간방에 살고 있는 '무명 저고리와 엄마'의 동화작가 권정생을 찾아간 계기가 되어, 1973년 1월 30일부터 2002년 11월 28일까지 30년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안부와 격려로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당시 이오덕은 마흔아홉의 교사로서 권정생보다 12살이나 많았죠. 하지만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자 때론 애틋한 연인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병약한 탓에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권정생에게 이오덕은 문학 후견인을 자처하며 온갖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죠. 약값을 비롯하여 연탄값 걱정과 읽고 있는 책 이야기까지, 혼자 잠 못 드는 밤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등 하루하루를 사랑으로 받아내며 써 내려간 편지 사연들이죠.

1970, 80년대 아동문학 흐름 가늠할 수 있는 귀한 사료들

물론 이 책에는 둘 사이의 애틋한 우정과 사랑만 담겨 있는 게 아닙니다. 아동문학에 대한 열정도 엿볼 수 있죠. 1970, 80년대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귀한 사료들이 담겨 있습니다. 뭔가를 꾸미고 포장하는 초월적인 세계를 대변하는 아동문학계를 벗어나 삶과 땀방울이 맺힌 실천적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아동문학계의 진면목 말이죠.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는 사람을 어떻게 보나 하는 문제가 되고, 그것은 그대로 문학관이 됩니다. 문학을 한다고 하는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는 뜻밖에도 아주 사람답지 못한 천박한 자연관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360쪽, 이오덕)

"이제야 세상이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빨리 달려가면 버스 좌석을 차지할 수 있고, 늦게 가더라도 새치기를 하거나 완력을 써서 차지하기도 할 테고요.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열두 살 아이가 자살을 할까요? 그 아이한테는 교육이 오히려 죽음을 가져다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학교가 있어야 할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362쪽, 권정생)

둘이 주고받은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 편지를 끝으로 이오덕은 2003년 8월 25일 새벽에 숨을 거두었죠. 충주의 무너미 마을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날마다 일기를 쓰고 시를 쓰며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그날 하늘 저편으로 건너간 것이죠. 그 뒤 권정생도 2007년 5월 17일 저 하늘나라로 건너갔습니다. 어쩌면 둘은 다시 만나 옛 편지와 추억을 떠올리며 웃음을 짓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평생 병약하고 가난 속에서 살던 권정생이 결코 유약하지 않은 인생을 산 것은 분명코 이오덕이란 동무를 만났기 때문이요, 그런 이오덕이 한평생 외롭지 않고 우리말 살리기에 박차를 가했던 것은 티없이 맑고 깨끗한 권정생이 지지해준 까닭입니다. 둘은 그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빛의 통로이자 커다란 버팀목이었던 셈입니다.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양철북(2015)


태그:#이오덕, #권정생, #선생님, 요즈음 어떠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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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기억력보다 흐릿한 잉크가 오래 남는 법이죠. 일상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려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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