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브라질은 뜨거웠다. 월드컵의 열기로, 그리고 월드컵 개막 전부터 폐막 때까지 지속된 월드컵 반대 시위대의 '신열(身熱)'로. 절대 빈곤에서 어느 정도 탈출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양극화와 빈곤 문제가 큰 브라질에서 혈세가 (빈곤자는 배제된) 세계인의 이벤트 비용으로 새는 것을 막으려는 행동이 꽤 낭자하게 벌어진 것이다.

국내외 유력 언론 매체들은 여기에 "월드컵 기간 치안 우려"라는 월드컵 수사를 뒤집어씌워 단발성 보도를 했다. 그런 식의 세계 뉴스를 통해 브라질 정부는 그 이벤트를 보호할 정당성(?)을 확보했고, 근래 들어 이례적인 대규모 군사 작전을 펼쳤다.

월드컵 반대 시위를 진압하면서 대테러 법에 대응하는 특별법 'AI-5'를 재연하고, 사전 검거도 불사했다. 특히 당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그 구호 하에 빈민지역을 통제하고 빈민들의 투쟁을 사전에 무차별 진압하는 동안 브라질 정부 공식 기록으로 2012년부터 작년까지 1890명이 죽었다.

'쓰레기'와 쓰레기의 대결

 영화 `트래쉬`의 한 장면

영화 `트래쉬`의 한 장면 ⓒ UPI 코리아


월드컵의 열기는 식고, 이후 정부 재정 적자 폭은 확대되고 물가는 상승하던 그 해 10월 영화 <트래쉬>(Trash)가 브라질에서 개봉했다. 원작은 쓰레기 더미 삶을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앤디 멀리건의 소설 <Trash>.

지난 5월 한국에서도 개봉한 <트래쉬>의 배경은 하필 개봉 몇 달 전에 브라질 당국이 월드컵 시작 전 '범행 모의'를 이유로 활동가 네 명을 사전 구속했던 리우데자네이루, 그리고 쓰레기장이다. 리우 안의 모든 쓰레기가 마을을 덮치는 무게에 눌리는, 빈민촌 중에서도 가장 낮은 땅. 영화 원작 배경인 필리핀이 아닌, 브라질의 빈민가로 영화 속 장소를 선택한 건 과연 우연일까?

이야기 흐름을 주도하는 14살의 라파엘, 가르도, 가브리엘(들쥐)은 쓰레기장에서 먹고 산다. 이들의 먹고 사는 터는 곧 모든 이들이 먹고 싼 것의 집결지이기에, 쓰레기장 밖의 시선은 아이들도 곧 쓰레기와 다름 아니다. 목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하루 뒤져 하루를 사는. 그런 그들에게 하루벌이는 제쳐두고라도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 생길 줄은? (본인들도) 몰랐다(하루살이에게 하루를 멈추는 것은 곧 죽음 아닌가).

라파엘, 가르도, 가브리엘은, 수십 년 째 수감 중인 변호사 존 클레멘테, 목숨을 잃은 호세 안젤로의 뒤를 이어 정치사회 부패를 드러내는 싸움에 뛰어든다. '뭔가 옳지 않은 일어났다'는 직감에 얼떨결에 빨려들었다. 그런데 애초 거액의 돈으로 아이들을 구슬려 원하는 걸 얻으려던 경찰의 태도가 점점, 역시나, 죽여버리겠다며 바짝 추격해오는 국면이다.

심지어 피살의 공포에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알아낸 잘못된 일의 중심에는 비리로 얼룩진 불법 선거 자금으로 시장 선거를 치르려는 유력 시장 후보인 국회의원 산토스(브라질 마약왕 마르셀로 산토스와 이름이 같음), 그와 결탁한 경찰 집단 간 카르텔이 있다. '정치 마피아.' 설상가상인데, 오히려 그들이 목숨 내걸고 이 일을 계속 할 이유는 명확해졌다. "Because it is right" 하는 게 옳으니까.

스토리 전개 내내 카르텔 내 핵심 활동을 맡은 인물이면서 이름도 한 번 언급되지 않는 경찰 반장도 몰랐다. 처음 쓰레기장에서 순순히 신상을 공개하던 (절로 코를 막게 될 정도로 악취 자체인) '쓰레기들(아이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옳은 일에 투신할 줄은. 결국 영화 처음과 막바지에서 교대로 노출된 장면, 총구를 들이대고 살 떨리도록 고뇌하는 라파엘의 눈과 그런 라파엘을 경멸에 차 바라보는 경찰 반장의 눈이 있다. 후자의 눈은 '진짜 쓰레기'가 누구인지 까발려진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을 숨기려는 불안정한 분노의 험상궂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고뇌의 끝에서 마침내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다른 자유로 떠나는 라파엘에게, 경찰 반장은 완전히 패배했다.

전도된 행동, 그리고 희망

영화의 끝은 이제 존이 호세에게 말했고, 다시 호세가 존에게 유언처럼 남긴 말대로 이루어진다. 줄리어드 신부는 아이들에게서 뜻밖의 산토스 비자금 장부를 건네받았다. (너희 같은 아이들이) "왜 이 일을 하느냐" 묻던 올리비아와, 역시나 같은 질문을 묻던 줄리어드는 마침내 깨어났다. '먹고사니즘' 너머의 옳은 것을 '실천하니즘'을 보여준 아이들 덕에.

시혜자 지위에 고착되어 행동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해버렸던 매너리즘에서. 그리고 아이들이 바통을 넘긴 '옳은 일'을 구체적으로 실천한다. 산토스의 장부를 전 세계로 폭로되고, 몇 십년간 감옥에 희생되었던 존의 자유는 호세와 라파엘의 희생적 모험, 줄리어드와 올리비아의 후원을 디뎌 대중에 투쟁의 가치로 전도된다. 브라질 정치사회 현실을 직면한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잠복하던 불씨는 그렇게 되살아났다.

이제 아이들이 떠나온, 해변 어느 가게의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희뿌연 불길 같은 시위대의 영상은 영화 관람자의 현실들과 서서히 오버랩 된다. 여전히 옳지 않은 일이 일어난 우리들 현실에서 감독이 원작 소설을 영화로 재해석하여 내놓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투쟁은 헛수고가 아니라는 (역사적으로 경험한) 이미 성취된 것과, 여전히 드러내야 하는 부패와 거짓이라는 아직 미성취한 것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우리 발밑은 아닐까. 그야말로 유쾌하고, 그래서 희망을 하는 아이들의 거뿐한 행동을 우리도 내디딜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전작들에 비하여 스티븐 달드리의 영화가 좀 달라졌다. 개인적 서사에 치밀하게 집중하면서 사회적 서사에 대하여 섬세하게 '진열'을 해놓던 그의 내러티브 방식이 뒤바뀐 듯한, 그래서 서사의 중심에 사회적인 옳음을 분명히 가져다 놓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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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프리랜서. 저널 <삼> 만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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