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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마이 갓…."

내가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내뱉은 말이다. 후텁지근한 공기는 내 몸을 휘감으며 찝찝한 열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정수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듯한 직사광선이 내리쬔다. 평소 5분도 버티기 힘들었던 불가마 입구에 들어선 느낌. 강렬한 태양은 모든 것을 다 태워 소멸시킬 듯했다.

"오늘은 나만 믿고 따라와."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릭샤기사 수시. 내가 가고 싶었던 암메르 포트(Amber Fort), 델핀과 안토니가 원했던 코끼리 빌리지와 함께 자신의 추천 일정까지 하루를 꽉 채울 것이라 말한다.

"오후에 계속 밖에 있으면 병이 날지도 몰라." 

수시가 오후 날씨는 견디기 힘들 것이라며 암메르 포트를 오전 일정으로 잡았다. 인도에서 연중 가장 더운 5월에는 야외 활동이 길어질수록 열사병에 걸리기 쉽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곳일지라도 너무 고된 날씨 속에선 여행의 들뜬 마음도 소용없는 일이다. 오전에 암메르 포트(Amber Fort) 관광객이 몰리는 이유도 무더운 날씨를 피해서라니 정말 인도의 한여름이 무섭긴 한가보다.

올드시티에 진입하자 어제는 노을과 함께 붉게 물들어가던 진한 핑크빛 건물이 흐릿하게 바래져있는 옅은 색감을 띄고 있었다. 분명 같은 장소를 바라보는데도 기분이 참 색다르다. 비슷한 계열의 분홍빛으로 통일돼 있는 건물들은 시간마다 보여지는 느낌이 다른 듯 했다.

낯선 공간이지만 색에서 받는 묘한 느낌을 만끽하는 중이다. 바다의 파란색을 보자면 시원한 청정함이 느껴지는 것처럼 분홍색은 사랑스럽고 무슨 이유인지 모를 친절한 기운이 감돌았다.

볼수록 예스러움이 전해지는 빈티지한 핑크빛은 분명 태양에 탈색된 흔적이지 않을까? 혼자서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컬러풀한 사리(인도 전통의상) 를 입은 인도 여성들이 줄지어 핑크시티를 거니는 모습은 한 편의 명화를 감상하는 기분처럼 매혹적이었다. 그 와중에 국방색 티셔츠에 회색바지를 입고서 컬러홀릭이 된 나는 완벽한 이방인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창문이 많은 이유, 뭐냐면요...

바람의 궁전이라고 불리우는 하와 마할(Hawa Mahal). “하나, 둘, 셋...... 열... 스물...” 재미삼아 창문을 세어보려다 복잡하고 헷갈려 그만 포기!
 바람의 궁전이라고 불리우는 하와 마할(Hawa Mahal). “하나, 둘, 셋...... 열... 스물...” 재미삼아 창문을 세어보려다 복잡하고 헷갈려 그만 포기!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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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메르 포트(Amber Fort)를 가기 전 잠시 들린 하와 마할(Hawa Mahal). 바람의 궁전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셀 수 없는 창문이 벌집처럼 빼곡히 박혀져있는 파사드(건축물의 출입구가 있는 정면 혹은 건물 외관을 의미하는 말)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크라운 왕관의 가운데 형상같기도 했는데, 건물의 대칭 구조가 기이하면서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창문이 왜 저렇게 많은 줄 알아?" 

수시의 말로는 외부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왕실 여성들이 실내에서나마 바깥을 구경할 수 있도록 만든 세상과의 통로였다고 한다. 창문의 모양은 타일처럼 반복된 패턴으로 나뉘어진 틀로 중앙에 문을 여닫을 수 있는 작은 창문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아래에 붙어있는 문을 여는 것인지, 아니면 틀 사이로 보는 것인지, 양쪽 다 시야의 폭은 상당히 좁을 듯했다. 안에서는 바깥을 볼 수 있었지만 바깥에서는 분명 건물 안 사정을 알 수 없었다.

층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촘촘해졌던 창문 틀 간격에서 왠지 위층은 더 은밀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지은 아름다운 무덤 타지마할이나 외출이 부자유한 여성들을 배려한 하와 마할같은 건축물을 마주하니 여성을 생각하는 인도 남성들의 마음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구속과 소유욕이 전해지면서도 애틋한 마음과 사랑의 의미도 깃들여져 있는 듯했다. 환상적인 외관도 그렇지만 탄생하게 된 과정을 듣고 있자니 인도 건축물은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다.

"미안한데, 오늘 일정 다 맞추려면 시간이 없어. 서둘러야 해."

올드시티를 벗어난 뒤 강길을 따라 보이는 언덕 위에는 근사한 성곽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자이푸르 시내에서 느껴졌던 컬러풀한 화사함과 달리 은은하고 고상한 기품이 느껴지는 성. 수시는 우리가 다녀올 때까지 주차장에서 기다리겠다며 조언을 덧붙였다.

이놈의 날씨... 강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암메르 포트(Amber Fort) 입구를 지나가는 소 한마리.
 암메르 포트(Amber Fort) 입구를 지나가는 소 한마리.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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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다면 코끼리를 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추천하지 않아. 억지로 코끼리를 사육시켜서 움직이기 때문에 정말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든. 굳이 여기 아니라도 정말 행복한 코끼리를 만나게 해줄게."

암메르 포트(Amber Fort) 올라가는 길. 스케일이 남다른 코끼리 배설물이 보인다.
 암메르 포트(Amber Fort) 올라가는 길. 스케일이 남다른 코끼리 배설물이 보인다.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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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모르게 지치고 힘들어보이는 코끼리의 표정
 어딘가 모르게 지치고 힘들어보이는 코끼리의 표정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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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수 없이 암메르 포트(Amber Fort)를 다녀왔다는 수시는 걸어서 10분이면 올라간다며 코끼리대신 걷기를 추천했다. 그의 말대로 계단을 걸어서 언덕 중간쯤 다다랐을 때는 코끼리가 사람을 태우고서 올라가고 있었다.

계단 옆으로 나란히 난 도로는 예나 지금이나 이동수단이었던 코끼리가 지나다니는 길이라고 한다. 우리는 행복한 코끼리와의 만남을 기대하면서 걸어서 성까지 올라갔다. 원래 입장료(200루피)가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늘은 무료란다. 입구에서는 꽃 한 송이를 건네주더니 눈썹 사이에 빨간 점도 곱게 찍어줬다.

성곽 청소를 끝낸 뒤 휴식을 취하는 여인들.
 성곽 청소를 끝낸 뒤 휴식을 취하는 여인들.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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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내부를 안토니와 델핀을 따라 정신없이 둘러보다가 무더운 날씨탓에 금방 지쳐버렸다. 나는 승리의 홀(Jai mandir) 맞은 편 그늘에 앉아서 성 밖의 전경을 바라봤다. 움직이는 것보다 머무르고 싶었던 나는 느린 걸음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이런 멋진 공간에 있을 기회가 자주 오는 것이 아니기에 더 자세히 둘러보고 싶었지만 갑자기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머릿속에 넣을 수도 없었다. 내가 아는 것조차 잠시 잊게 되는 느낌. 아, 여기서 잠시 쉬어 가야겠구나 생각했다. 다 보기 위해 무리하게 서두르려는 마음이 날씨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 같았다.

여행을 하면서 여전히 맞추기 어려운 건 조급함과 여유 사이의 균형이다. 낯설고 새로운 광경을 마주한 마음은 항상 더 조급해지려는 경향이 짙어진다. 더 많이 보고 담으려는 욕심이 생겨서일 테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선 지금 이대로도 만족한다며 서두르던 발걸음에 쉼표를 안겨줬다.

미색의 암메르 포트(Amber Fort)와 참 잘어울렸던 흰색 사리를 입은 여인.
 미색의 암메르 포트(Amber Fort)와 참 잘어울렸던 흰색 사리를 입은 여인.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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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을 끝낸 뒤 승리의 홀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길을 안내해주겠다고 나섰는데 과잉된 친절이 팁을 요구할 것 같았다. 그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갈수록 괜한 의심이 생겼다. 델핀과 안토니도 생각이 같았는지 그냥 입구를 안내해달라고 말했다.

우리가 그를 따라나선건 고작 5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공포가 스며들었다. 그가 다왔다며 손가락을 가리킨 곳은 깊게 파인 우물이었다. 그 속에는 수백 마리의 박쥐떼가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오금이 저려왔다.

정말 인도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을 다양하게 경험하게 해준다. 역시나 팁을 요구하여 20루피를 건네자 그는 구겨진 인상으로 손바닥을 다시 펼쳐 들었다. 나는 못 본 척하며 잽싸게 계단을 내려왔다.

"인도인은 더위에 강하지 않아?" 돌아온 대답은...

암메르 포트(Amber Fort)를 들어가는 입구에서 받았던 꽃 한송이
 암메르 포트(Amber Fort)를 들어가는 입구에서 받았던 꽃 한송이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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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다 보니 타지마할처럼 구걸을 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자연스럽게 다가오는지, 그럴 때마다 나는 가방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몰려드는 사람들의 부탁에는 하나하나 포즈를 취해줬다. 뻥튀기 과자를 팔고 있는 노점상의 모습이 예뻐 사진을 찍으려하자 내게 화를 내면서 돈을 요구한다.

"얼마면 당신을 찍을 수 있나요?" 

내 물음에 그 사람은 100루피(한화 1700원)라고 답했다. 포즈를 잘 취하겠다고 한다. 20루피(한화 350원)짜리 빵 다섯 개를 팔지않고도 생기는 이익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1분 전과는 달리 그 사람을 찍고 싶지 않아졌다. 부자연스럽게 웃어보이는 그의 표정에 카메라를 내려버렸다.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호수 위에 떠 있는 궁전인 잘 마할(Jal Mahal)을 찍을 겸 릭샤를 멈춰 세웠다. 원래 땀이 없는 체질인데 오늘은 날씨를 제대로 만난 듯. 이미 티셔츠는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고, 숨쉬기도 힘든 날씨에 얼른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게다가 물 위의 풍경과는 달리 폐수 냄새와 곳곳에 흩어져있는 쓰레기 더미에 코를 막으면서 5분 만에 릭샤로 돌아왔다.

호수 위에 떠있는 궁전 잘 마할(Jal Mahal). 보기엔 근사했지만 호수 주위는 쓰레기 매립지 수준이었다.
 호수 위에 떠있는 궁전 잘 마할(Jal Mahal). 보기엔 근사했지만 호수 주위는 쓰레기 매립지 수준이었다.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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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에 먹음직스럽게 담겨진 점심식사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담겨진 점심식사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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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전체가 찜질방처럼 습한 열기로 가득했다. 오늘따라 어딘가 안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코끼리 빌리지에서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듣고 놀라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안토니와 델핀은 먹이를 주고 잠시 코끼리를 타고 동네 한바퀴를 도는 패키지에 각 4000루피(한화 약 7만 원)를 지불했다.

"코끼리는 얼마동안 임신하는 줄 아시나요?" 
"저 코끼리가 암컷으로 보이나요? 수컷으로 보이나요?"

코끼리 빌리지의 주인의 질문 공세에 아리송한 답변을 하며 친구들을 기다렸다. 대충 '1년 아닌가요?' 대답했지만 코끼리는 22개월 동안 임신을 한다고 한다. 게다가 빌리지에 있는 코끼리는 전부 암컷이었는데 수컷은 공격적이고 괴팍해 일반인들이 타기엔 위험하다고 한다. 코끼리 전문가에게 들은 코끼리 이야기는 흥미로웠지만, 너무 더운 나머지 점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잔타르 만타르(Jantar Mantar)라는 해시계가 설치된 천문대에 들러서는 둘러보지도 않고 그늘을 찾아 앉아버렸다. 잔타르 만타르 옆에 있는 시티 팰리스도 가고 싶었지만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다.

그저 태양이 없는 곳에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 싶었다. 수시도 지쳐 보였다. 그래도 텍스타일 공장은 꼭 보여주고 싶다며 그곳에 들른 뒤 한 시간만 집에 가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우리를 기다리다가 더위를 먹은 것 같다며 집에 가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잠을 자야겠다는 말이다.

"인도 사람은 더위에 강하지 않아?"
"무슨 소리야, 인도 사람도 다 같은 사람인데…. 나 더위에 엄청 약해."

오직 한 손으로만 바느질을 하던 신기한 남자.
 오직 한 손으로만 바느질을 하던 신기한 남자.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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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푸르는 보석, 섬유 공예가 굉장히 발달한 지역이라고 수시가 강조하며 말했다. 아침에 암메르 포트(Amber Fort)를 가면서 유독 TEXTILE(텍스타일)이라고 적힌 간판이 많았는데 정말로 유명하긴 한가 보다.

그도 이윤을 남기기 위해 들른 것 같았지만 실제로 좋은 소재의 이불, 옷, 스카프, 카펫을 판매하고 있었다. 공장은 폐가 같은 곳이었지만 우리가 들어서자 사람들은 직물을 베틀에 짜거나 천에 한 땀 한 땀 보석을 바느질하며 수공예를 보여줬다.

이벤트의 일종이었지만 내가 만져봐도 원단과 기술은 예사롭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천을 펼쳐 보이며 부단히 영업을 한 끝에 나는 스카프 한 개, 델핀과 안토니는 무려 일곱 개의 스카프를 구매하고 공장에서 빠져나왔다.

베틀 앞에 서 있는 델핀
 베틀 앞에 서 있는 델핀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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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차가 다니는 도로인데 낙타가 지나간다
 분명히 차가 다니는 도로인데 낙타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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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위험할까? 코끼리가 위험할까?
 차가 위험할까? 코끼리가 위험할까?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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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이동하는 길에 낙타, 소, 코끼리가 난입해 잠시 도로에 갇혀버렸다. 정말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기한 풍경이었지만 어서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이 곳에서 적응할 수 있을까?

오늘 하루는 더위에 쫒기고 이상하게 마음이 바빴던 날이다. 수시는 끝까지 우리를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다며 저녁엔 한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아무도 없는 허름한 식당에서 무엇을 주문하기도 우리가 왜 여기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수고했다고 스스로 칭찬하며 음식을 주문하는데 우리 셋은 그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꼈다. 우리가 계산해야 하는 분위기였는데 싫은 내색을 하고선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틀을 함께한 정을 생각해서 내일 아침 공항 픽업을 요청하고선 그와 헤어졌다. 내일이면 떠나게 될 자이푸르는 꽉 채워진 듯하면서 어딘가 모르게 허전했다. 보는 둥 마는 둥 따라다니면서 마음이 느긋하지 못한 느낌이랄까?

오늘 경험한 모든 것들로부터 진한 추억을 선물받았지만, 순간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건 날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욕심 때문일까? 내일은 더 가볍게 오늘보다는 더 천천히 인도를 만나고 싶다.


태그:#인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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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설레며 살고 싶은 자유기고가. 현재는 스웨덴에서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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