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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용무도(昏庸無道). 교수신문에서 매년 연말에 그 해를 함축하는 고사성어를 발표하는데, 올해는 혼용무도가 선정되었다.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무도하다.' 메르스, 세월호, 교과서 국정화, 최근에는 위안부 문제까지 여러 현안에 있어 국회나 정부가 보여준 정치력은 분명 어지럽고 무도했다. 내년 4월에 있을 20대 국회의 방향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혼용무도했던 올해의 정치 실태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어째서 한국 정치는 많은 이들에게 개혁을 요구 받고있는가.

정치란 무엇일까. 정치는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권력 행위이자 그 가운데 일어나는 상호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이다. 어떠한 사회에서든 갈등은 불가피한 존재를 넘어 필수적인 부분이다. 일찍이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인간 상호주의로 나타나는 투쟁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를 불문하고 모든 사회의 특징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문제의 혼란은 갈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결하고 논의하는 과정에 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단어가 '소통'이라는 점은 한국 정치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만큼 정치 영역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데 있어 많은 이들이 소통을 갈망하고 있다. 분명 19대 국회와 현 정부는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아젠다를 서로 공유하고 조정하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정치 실패의 단적인 예로 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거론할 수 있다.

교과서 국정화 정책은 우리 사회에 정치가 얼마나 무너졌는가를 보여준 예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역사관만을 채택하여 모든 이들이 학습하도록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지닌 폭력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정책이 추진된 절차나 과정 자체가 반정치적 성격을 지닌다.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각각이 다른 견해를 지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정부가 주도하여 하나의 교과서로 통합하려는 시도에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의 요소가 짙다.

뿐만 아니라 이 정책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다른 의견을 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나 여당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방식은 어떠한 정치적 시도조차 보이지 않은 처사이다. 이것은 한국 정치가 정치적 기능을 상실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고 상이한 의견들을 수렴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주체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국 정당 정치의 유명무실이 깔려있다.

19대 국회에서 새누리당이나 더불어민주당(전 새정치민주연합) 등의 정당들은 입법부의 정치 주체로서 보여줘야 할 정치력을 좀처럼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전자는 정부의 입김에 쉽게 휘둘리는 모습을, 후자는 여권을 대체하는 통합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만 비췄다.

최근 안철수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해 독자 노선을 구축하며 기존 정당과 차별화하려는 부분이 이 지점이다. 물론 이것의 타당성이나 효과성에 대해서는 논의해야겠지만, 여론 조사를 보면 이러한 시도가 기존 정당 정치에 시민들이 지닌 실망과 냉소를 일정 부분 대변한다고 해석하기에는 충분하다.

20대 국회가 정치 개혁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부분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다. 입법부의 정상화를 위해 각종 파벌과 계파 싸움에서 벗어나 정당정치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정 과두 정치인들이 정당 전체를 좌우하는 영향력을 혁파하고 정당 스스로가 표방하는 가치와 이념에 집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과 더욱 친밀하게 소통하고 바람직한 정당모델에 대해 심도 깊은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의 논문을 통해 보편적 담론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 바 있다. 시민적 공론 영역의 담화 절차 속에서 해소된 논증의 힘만이 합리적인 권위와 지배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정치는 더 이상 특정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당정치는 시민들이 담론을 형성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20대 국회는 민주주의가 지닌 담론의 힘을 기반으로 존재해야 한다. 각각의 정당과 의원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담론을 형성하고 참여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비록 혼용(昏庸)하더라도 길이 있을 것(有道)이다.


태그:#정치, #정당, #병신년,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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