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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소년이다. 할아버지와 수레를 끄는 개 '파트라슈'와 함께 우유 배달 일을 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도화지 살 돈이 없어 널빤지에 목탄으로 그리면서도 화가를 꿈꾸었던 소년 네로는 거장 루벤스를 존경한다. 앤트워프 대성당에 커튼이 쳐진 채 걸려있는 그의 작품을 보고 싶어하지만, 관람료인 '금화 한 닢'을 낼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파트라슈와 함께 생활하던 네로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은 미술대회에서 입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질은 뛰어났어도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네로는 배움이 모자라 완성도 높은 그림은 제출할 수 없었다.

혼신을 다해 그린 출품작이 낙선하였을 무렵 야속하게도 플랑드르의 겨울이 다시 찾아온다. 우유 배달 일이 끊긴 네로는 세 들어 있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고, 마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 방화범의 누명마저 뒤집어 쓴다.

겨울날 갈 곳도 없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맴돌다 들어간 곳은 루벤스의 대성당. 성모님의 은총이었는지 그날은 특별히 그림에 쳐진 커튼이 걷혀 있었다. 루벤스의 대작 <십자가에서 내리심>을 바라보다 네로는 더는 여한이 없음을 주님께 고백하며 굶주린 개 파트라슈와 함께 얼어 죽는다.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리심>을 바라보는 네로와 파트라슈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리심>을 바라보는 네로와 파트라슈
ⓒ Nippon Ani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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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80년대 여러 차례 방영된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의 줄거리다. 이 만화영화는 착한 주인공도 죽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하며 권선징악에 익숙했던 당시 아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최초 방영된 일본에서는 '네로'를 구해달라는 전국 어린이들의 편지와 엽서가 방송국에 쇄도할 정도였다고 한다.

소년의 비극이 남긴 트라우마를 간직한 것은 이 땅의 어른들도 마찬가지였었나 보다. 지난 12일 <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오는 4월 10일까지 전시)을 보기 위해 찾아간 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는 실물 크기의 파트라슈가 배달가방을 목에 걸고 있었다.

전시된 전체 120여 점 가운데 정작 루벤스의 작품은 내가 세어본 바로는 25점 정도였고 네로가 보고 싶어 했던 <십자가에서 내리심>도 없었다. 나머지는 반다이크, 요르단스, 브뤼헐 일가를 포함한 같은 시대 네덜란드 작가들의 그림이었다. 그냥 '리히텐슈타인 박물관 명품전'이라고만 이름 붙여도 좋았을 이번 전시에서 기획자가 찾아낸 대중과의 접점은 귀엽게도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와 소년 네로가 그토록 닮고 싶었던 '루벤스'였던 것이다.

전시회 입구의 파트라슈
 전시회 입구의 파트라슈
ⓒ 박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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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텐슈타인 공국, 그런 나라도 있었나?

전시회 제목에서 '리히텐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난생처음 접했다. 나는 이것을 독일의 한 도시, 또는 멸망한 중세의 제후국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리히텐슈타인 공국'은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유럽의 국가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자리잡아 바다에 접해있지 않은 내륙국인데 서울특별시의 4분의 1 정도의 면적에, 인구는 4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외교와 국방은 스위스에 위임하며 국민 중 다수가 이웃 나라에 출근하고 모국인 리히텐슈타인에는 잠만 자러 오는 '침상국가(?)'이다. 하지만 금융업을 핵심산업으로 운영하며 1인당 구매력이 9만 달러를 넘는 '강소국'이기도 하다.

'리히텐슈타인 공국'(가운데 빨간 테두리)은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다.
 '리히텐슈타인 공국'(가운데 빨간 테두리)은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다.
ⓒ 구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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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는 나라 이름이 말해주듯 '대공(大公)'이 다스리는 입헌군주제이며, 작위는 아들만이 계승할 수 있다(이를 '살리카법'이라고 한다). 지금의 국가 원수는 한스 아담 2세인데 LGT 은행의 사실상 총재로 금융업을 경영하고 있기도 하다.

LGT 은행은 원래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외국 부자들의 조세 회피처로서 활용돼왔다. 아예 왕실이 나서서 '돈 세탁'을 주업으로 삼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한스 아담 2세의 개인 재산은 한화로 약 5조 원으로, 세계 군주들 가운데 여섯 번째로 부자다.

쿤스트 캄머, 예술의 방

가문의 시조인 한스 아담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리히텐슈타인 공의 지위를 얻은 것은 1719년. 프랑스에서 절대왕정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시절, 예술가들을 후원해 기독교 세계의 문화 수준을 향상시키는 건 유럽 왕실의 책무로 여겨졌다.

또한, 미술품을 수집하고 소장품을 대외에 자랑하는 것은 왕실의 명예를 드높이고 체통을 유지하는 한 방법이기도 했다. 리히텐슈타인 가문 또한 의무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예술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럽에서 명성을 떨쳤다.

<수집가의 방(A collector's gallery)>
 <수집가의 방(A collector's gallery)>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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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전시실에 들어서자 마자 펼쳐지는 첫 번째 방 <쿤스트캄머>는 그래서 이번 전시회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전시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자. 한 고귀한 여성이 예술품이 가득 걸린 거대한 방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이 여성은 벽에 걸린 몇몇의 그림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그는 손님들에게 이 작품들을 공개하며 한껏 우월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공간의 이름이 바로 쿤스트캄머 (Kunstkammer, 우리말로 '예술의 방'), 오늘날 미술관의 시초다. 

이번 전시회 <쿤스트캄머>에는 실제 예술의 방에 꾸며져 있을 법한 조각과 그림들이 정해진 장르 없이 진열돼 있었다. 우선 머리카락이 꼿꼿이 곤두선 남자가 사슬에 묶인 채 절규하는 흉상 <배덕의 알레고리>가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아르침볼도의 <흙>도 두드러졌다.

사람을 그린 듯도 하고 동물을 그린 듯도 한데 제목은 '흙'(Earth)이다. 사슴도 사자도 코끼리도 흙을 밟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로 이해했다. 흙이라서 그런지 전체적인 색도 갈색이 지배적이다. 앞서 흉상의 제목에는 '알레고리'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우리말로 '우의','풍자'를 의미하는 말이라 한다. 아르침볼도의 <흙>을 <흙의 알레고리>로 제목을 바꿔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아르침볼도 <흙(Earth)>
 아르침볼도 <흙(Earth)>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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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는 기독교 성인과 전설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값져 보인다는 것은 이해하면서도 신앙심이 없어서인지 별 감흥은 느낄 수가 없었다. 한 여성이 아이들 앞에서 그림에 담긴 복음적인 의미를 해설해 주고 있었다. 무리 짓고 있어 그림에 다가가기 힘들고 해설도 듣기 싫어서 다음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 전시 때는 번호표를 발급해주며 사람이 몰려 감상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통제가 없었다. 때문에 사람이 많은 곳은 나중을 기약하고 일단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수차례 있었다.

연예인의 목소리로 녹음된 오디오 가이드가 제공되고 있었다
 연예인의 목소리로 녹음된 오디오 가이드가 제공되고 있었다
ⓒ 박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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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의 방

내 멋대로 이름을 붙였지만 첫 번째 공간으로부터 연결돼 진입한 곳은 분명 그런 장소인 듯했다. 이곳에는 귀족의 식탁에 오르던 식기류, 서재에 앉은 귀부인의 초상화와 그가 몸을 기댄 사무용 책상, 시간보다는 소유한 자의 재력을 알려주는 듯한 시계가 놓여 있었다.

여성의 방에 어울리는 그림도 몇 점 걸려 있었는데, 뱀독에 물려 푸르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앞에선 모든 사람이 잠시 발이 묶였다. 한가득 정신없이 꽂혀 흘러넘치도록 화사한 꽃 그림이 있었고, 그 옆에 상아를 깎아 만든 큰 잔은 손끝도 닿기 아까울 정도로 정교하게 세공돼 있었다.

미덕이 없으면 절제 없이 치달을 인간의 허영심을 보는 거 같았다. 잔이란 원래 음료를 마실 때 쓰라고 있는 물건일 뿐이다. 단지 남들에게 없는 것을 가지기 위해 코끼리를 죽여야 하는 게 본능이라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프란츠 사버 페터 <꽃병에 담긴 꽃다발(A BOUQUET IN A VASE)>
 프란츠 사버 페터 <꽃병에 담긴 꽃다발(A BOUQUET IN A VASE)>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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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대 있는' 집안의 사람들

바로크 시대에 공국의 기초를 닦은 가문의 시조를 시작으로 오늘날 국가원수에 이르기까지, 리히텐슈타인 가문 수장들의 초상이 마련된 공간도 별도로 준비돼 있었다. 연대가 현대에 가까워지면서 초상화는 흑백사진으로 바뀌고 흑백사진은 컬러 사진으로 변해갔다.

나는 18세기의 조상에 대해 알고 있을까. 족보를 뒤져보면 이름이야 알겠지만, 그것도 진위가 의심스럽다. 대부분의 사람이 나와 다를 바 없다. 뼈대 있는 집안은 그런 점에서 우월감을 누릴 수 있다.

이 액자들이 걸려있는 것이 큐레이터의 설계였는지, 아니면 리히텐슈타인 박물관이 대여에 앞서 내세운 전제조건이었는 지 궁금하다. 어쨌든 나에겐 특별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영지는 스위스 인근과 체코슬로바키아에 있었지만, 가족이 머문 곳은 빈 근교의 리히텐슈타인 성이었다고 했다. 빈의 사교계에서 정치를 펴고 교양을 누리다가 채찍을 들고 영지로 돌아오곤 했을 것 같다.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기초를 닦은 한스 아담 1세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기초를 닦은 한스 아담 1세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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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의 화실

조금 어두워진 복도로 들어서자 벽 전체에 프린트 된 한장의 지도가 이제부터 본론임을 예고했다. 16세기 쾰른출판사가 발행한 <안트베르펜 지도>. 이곳에서 루벤스와 당대의 천재들이 함께, 또는 이웃에 살며 오늘 여기 전시된 작품들을 창조해냈다. 이제부터 <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이라는 제목에 부합하는 공간이 펼쳐지는데, 안트베르펜 지도를 바라보는 현 위치에서 출구에 이르기까지 전시실은 6개의 구역으로 또 다시 나뉘어져 있었다.

16세기 <안트베르펜(Antwerpen) 지도>. 쾰른 출판사 발행.
 16세기 <안트베르펜(Antwerpen) 지도>. 쾰른 출판사 발행.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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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 섹션의 약도. 전시실은 수집가의 방을 묘사한 <쿤스트캄머>와 <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로 크게 2가지 테마로 나뉘어 있었다.
 <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 섹션의 약도. 전시실은 수집가의 방을 묘사한 <쿤스트캄머>와 <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로 크게 2가지 테마로 나뉘어 있었다.
ⓒ 박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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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편의 서막은 5살 난 여자아이의 조그만 손으로 걷혔다. 섹션 입구에 단독으로 걸린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의 초상>은 루벤스가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을 당시로선 흔치 않은 구도로 그린 것이다.

도화지 전체를 가득 채운 아이의 얼굴이 정면을 천진하게 응시하고 있다. 눈동자에는 미소 짓는 아빠 루벤스의 얼굴이 비칠 것만 같다. 분명 돈을 위해 그린 것이 아니었다. 붓질하는 손이 신명에 떨렸는지 옷 부분은 미완성인 듯 거칠게 칠해져 있다. 아이는 12살에 병에 걸려 죽어서 루벤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기초적인 위생학조차 정립되지 못한 17세기의 일이다.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의 초상>
 <클라라 세레나 루벤스의 초상>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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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 그림이 홍보아트로 선정된 게 불만이었다. 지난번 내가 방문한 <폴란드, 천년의 예술>에서도 중앙박물관이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20세기에 그려진 <워비치의 소녀>였다. 특별전시실의 높은 외벽을 가득 채운 거대한 그림이 실제로 보니 전시회에서 가장 작은 그림이었다.

아무리 돈 되는 광고의 3대 요소가 '미녀, 동물, 어린이'라고 하지만 전시회의 주제와 가장 결합하지도 않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는 게 좀 마뜩잖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본다. 내가 전시 기획자였다면? 불평하면서도 뚜렷한 답이 나오질 않는다. 어쩌면 전시회 측이 가장 무난한 답을 내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중앙박물관의 외벽을 장식했던 거대한 <워비치의 소녀>
 중앙박물관의 외벽을 장식했던 거대한 <워비치의 소녀>
ⓒ 박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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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작된 본편의 첫 번째 섹션은 반다이크와 요르단스의 생동감 넘치는 그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전성기의 루벤스가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인용돼 있었다. 함께 일하게 해달라며 찾아온 이들이 지나치게 많아 1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을 거절해야만 했다는 고충이었다.

루벤스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반다이크가 그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루벤스의 공방에서 작업하는 방식은 루벤스가 밑그림을 잡으면 조수들이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들을 대신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인지 숱한 작업을 함께했을 반다이크의 그림은 언뜻 봐서는 루벤스의 것과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다만 내 어두운 눈으로 봤을 때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그리는 대상에 있었다.

루벤스는 신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그래서 많은 그림이 복음을 주제로 하였고, 예수와 성인들은 루벤스의 주요한 테마였다. 반면에 반다이크는 좀 더 세속적인 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가장 출세했던 시절에 그는 영국 왕실에서 오만하고 사치스런 찰스 1세의 초상화를 작업하고 있었다.

루벤스가 하늘의 화가였다면, 반다이크는 지상의 화가였다고나 할까. 온통 미남 미녀들이 예수 성자들과 뒤엉킨 모습을 그린 루벤스와 달리 반다이크의 등장인물들은 어딘가 부도덕하고 기만적인 내면을 노출하고 있었다. 내가 반다이크에게 좀 더 끌렸던 이유가 그랬다.

반다이크 <찰스1세의 초상>
 반다이크 <찰스1세의 초상>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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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에 찾아가기 전부터 나는 이번에 맞이할 경험은 꼭 기사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갤러리를 누비는 내내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한편으론 기삿감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득 앞서 귀부인의 방에서 본듯한 화사한 꽃 그림이 눈에 띄었다.

화분에서 꽃들이 넘쳐흘러 떨어지는 표현도 비슷했는데, 이걸 상아 잔에서 떠올린 지배층의 사치와 엮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나는 다시 귀부인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착취와 방탕이 절정에 달한 바로크 시대를 기대하며 연도를 확인했다. 그런데 웬걸, 제목 아래 찍힌 연도는 19세기도 한참 지난 1845년이었다.

제대로 헛짚은 나는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되돌아오는 걸음이 터덜 터덜 한숨짓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찾아온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휴식이 필요했다. 몇 호흡 가다듬고 있는데 별안간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는가 싶더니 괄약근에 긴장이 풀리며 '뿌-웅' 하는 가죽 나팔이 기염을 토했다.

순간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눌렀다. 불혹을 향해 달려가는 축적된 인생의 경험이 지금 뒤돌아보면 얼굴이 팔린다는 것을 (그리고 범인이 나라는 것을 자백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포착한 것이다. 이리하여 바로크 귀족의 방탕에 대해 쓰려던 감상문은 내 괄약근의 일탈에 대해서 쓰여지게 됐다.

만약 내가 말라위에 있었다면...
 만약 내가 말라위에 있었다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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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걸작들 앞에서 질소와 암모니아 등의 혼합가스를 배출한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아니, 도망쳤다). 그리고 목적 없이 방황하다 그저 벽을 바라보고 싶어 정처 없이 걸은 끝에 전시실 한구석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루벤스가 작업을 지휘한 태피스트리 연작 <데키우스 무스>가 있었다. 고대 로마공화정의 집정관이었던 데키우스 무스는 공화정의 운명을 건 싸움에서 자기 목숨을 신들의 제물로 바쳐 아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지휘관이 전사하는 군대가 승리한다는 예언을 듣고 고뇌했지만, 결국 목숨을 영원한 명예와 바꾼 숭고한 데키우스 무스여. 그대는 나를 비웃는가.

루벤스와 얀 라스 공방 <릭토르를 보내는 데키우스 무스>
 루벤스와 얀 라스 공방 <릭토르를 보내는 데키우스 무스>
ⓒ 리히텐슈타인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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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유럽의 건축물은 단열재가 발달되지 않은 시절이라 날씨가 추워지면 외풍에 취약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귀족의 집에는 벽에 추위를 막아줄 양탄자 같은 것을 발랐는데, 이것은 공간을 장식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이것을 태피스트리라고 한다. 직물공예를 루벤스가 직접 하였을 리는 없고 그가 그린 원작을 가지고 얀 라스의 공방이 작업했다고 한다. '루벤스의 방'에서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판화 등 다양한 포맷의 작품들과 함께 루벤스 예술의 폭을 짐작하게 했다.

네덜란드, 플랑드르 그리고 이탈리아의 거장들

프랑스, 이탈리아의 미술은 꾸준히 사랑받아왔는데 요즘은 네덜란드 화가들이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내가 듣게 될 정도라면 꽤 오래된 추세일 테다. 루벤스가 바로크 미술의 거장이었다면 피터르 브뤼헐은 플랑드르에서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다.

그의 시대를 북유럽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베들레헴의 인구조사>에서 브뤼헐의 이름을 보았을 땐 이때가 첫 만남인 줄 여겼다. 하지만 검색을 해보니 우리는 구면이었다. '바벨탑' 신화에 대해 적힌 글을 볼 때 마다 영화의 클리셰처럼 첨부되있던 삽화가 너무나도 눈에 익숙했던 것이다.

피터르 브뤼헐 <바벨탑>
 피터르 브뤼헐 <바벨탑>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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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의 인구조사>는 관람객이 맨 처음 보게 되는 그림이다. 이것은 전시회 벽과 팸플릿, 누리집 등 전시와 관련된 곳곳에 실려있다. 언뜻 보기엔 아기 예수를 뱃속에 품은 마리아가 쉴 곳을 찾아 헤매는 복음적인 그림인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림 속의 세상이 브뤼헐이 실제로 살았던 시대의 플랑드르 지역이다. 그렇다면 이곳의 임금도 포악한 헤롯왕이 아니라 당시의 군주일 것이다. 이렇듯 브뤼헐의 그림은 성서라는 익숙한 소재 안에 시대적 문제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교회와 왕실에 헌신한 루벤스와 종교적인 형식을 가장해 지배층을 비판한 브뤼헐. 이 두 사람이 같은 공간을 누린다는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특별전시회는 더욱 '특별'해 보인다.

피터르 브뤼헐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피터르 브뤼헐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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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다른 화가들도 '루벤스 공방'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냥감을 그린 사실적인 정물에선 피가 뚝뚝 떨어질 거 같다. 돛단배의 선체에 부딪혀 물방울을 흩뿌리는 파도의 묘사에서 근대의 조짐이 느껴졌다. 앞서 거쳐온 성화들 속의 파도는 마치 대리석을 조각해 색칠해놓은 듯 만져도 젖지 않을 것 처럼 딱딱한 느낌이 들었었다.

하지만 카톨릭을 버린 네덜란드 화가들은 짜디짠 바다 내음이 느껴질 만큼 사실적으로 그리길 원했다. 신교회와 구교회의 풍경을 그린 반 빌렛의 작품에서도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그가 그린 교회의 모습에는 성자도 없고 악마도 없었다. 그저 무료한 공간을 사람들이 오가고, 만나고 헤어지다 한쪽에 놓인 관 속에 들어갈 뿐이다.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종교를 찾지만, 거기에도 마찬가지 삶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반 빌렛이 그린 교회의 풍경
 반 빌렛이 그린 교회의 풍경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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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살아간 화가들에게 세상은 어떤 것이었나. 계급사회는 정당한 것이며 인간의 귀천은 하늘이 정한 것이라는 믿음 아래서 절망하던 그들에게 유일하게 공평했던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죽음의 암시는 전시회 곳곳에서 두드러졌다. 여기저기를 배회하다 브뤼헐 일가의 갤러리에서 <죽음의 승리>를 목격한 순간 내게 남은 건 눈앞의 단 하나뿐, 그 밖의 모든 것은 지워져 버렸다.

피터르 브뤼헐 <죽음의 승리>
 피터르 브뤼헐 <죽음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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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군대가 포위한 세상에는 풀 한 포기 조차 삶을 허락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발버둥 치고 칼을 뽑아 대항해보기도 하지만 역부족이다. 출구인 줄 알고 떼를 지어 몰려간 곳은 거대한 '관'일 뿐이었다. 해골들이 붕괴한 성채 위에서 종을 흔들어 댄다. 세상의 군주들에게 울리는 경종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죽음은 삶과 싸워 언제나 승리한다. 무서운 그림이라기보단 평등한 그림이다. 16세기의 화가에게 삶의 궁극적인 진리는 이처럼 모두에게 평등한 죽음이었다.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든 전시회에서 방귀를 뀌고 달아나든 결국 우리는 모두 죽는다.

전시회와 숫자들

최후의 공간 '루벤스의 아카이브'에는 거장의 성공적인 삶이 연대별로 정리돼 있었다. 깨알 같아서 좀 질리는 느낌이라 세세히 다 읽지는 않았다. 다만, 리히텐슈타인 박물관장의 말은 떠올랐다.

그의 삶은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본인의 이상을 한껏 누린 것이었다고 했다. 그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루벤스와 숫자들'이라는 기획물이었다. 숫자 1을 네로에게 필요했던 금화 한 닢과 연관 맺은 것을 시작으로, 4는 루벤스의 기상 시간, 100길더(7백만 원)는 그의 하루 평균 수입, 1403은 총 작품 수, 2000은 루벤스의 공방에서 제작된 작품 수, 2400은 <십자가의 내리심>을 그린 대가로 받은 돈(1억6800만 원)…. 이런 식의 숫자놀이가 펼쳐졌는데 가장 큰 수는 그가 죽으면서 남긴 재산인 '1966억'이었다.

기획전시실 로비에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 도록을 포함해 방금 관람객이 보고 나온 그림을 프린트한 문구 같은 것을 팔곤 한다. 이날 방문한 내가 취재수첩에 기록한 물품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엽서 2500원, 서류파일 2000원, 마우스패드 3000원, 도록 2만6000원, 그림 퍼즐 1만2000원, 노트 2000원 등등.

나는 꽃과 귀부인이 프린트된 것들을 몇 점 샀다. 다른 사람과 함께 왔을 때는 결코 이런 데서 물건을 사진 않았다. 그냥 문구점에서 700원 하는 것을 단지 그림이 프린트됐다는 이유로 2000원 주고 사는 감성을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홀로 다니게 되고 나서부터는 필요도 없는 것을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산다. 그리고 깨달았다. 가지고만 있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언젠가 착한 사람들이 보이면 하나씩 선물해주고 싶은 계획이 생겼다.

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의 기념품 코너. 어디든 전시회를 가면 이런 것들을 팔곤 한다.
 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의 기념품 코너. 어디든 전시회를 가면 이런 것들을 팔곤 한다.
ⓒ 박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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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을 마치고 빛이 환한 출구 쪽으로 다가갔다. 거기엔 퇴장을 앞두고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마치 등산로에서 정상에 도달했을 때 풍경이 연상돼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뭔가 뿌듯한 기분을 나도 느낀다. 프랑스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루벤스를 평생 흠모했다고 한다. 전시회 출구 옆에는 들라크루아가 바치는 예찬의 말이 적혀 있었다. 루벤스는 회화의 호메로스라는 말. 하지만 서양예술보다는 어릴 때 본 만화영화가 오히려 친숙한 나는 차라리 다른 말이 적혀 있었다면 먼 길을 찾아온 보람을 느낄 수 있을 뻔했다. 네로가 삶의 출구를 나서며 했던 말이다.

"파트라슈. 이제 됐어.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림을 봤으니…. 성모님, 감사합니다. 저는 더 이상 부족함이 없습니다."


태그:#루벤스와 세기의 거장들, #리히텐슈타인 박물관 명품전, #국립중앙박물관, #리히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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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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