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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한번 가봐야 할 곳'. 이런 수식어를 가진 장소들은 너무 많습니다. 가보지 않은 입장에선 어디가 정말 좋은 데인지 알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세계 곳곳을 둘러본 시민기자들에게 '진짜 나만의 최고 여행지'를 물어봤습니다. 믿고 보는 추천 여행지,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도합니다. [편집자말]
인도여행은 매력적이다. 히말라야 설산을 보며 명상을 하다가, 자이살메르에서 낙타사파리를 즐길 수도 있고, 고아의 해변에서 파티를 하다가, 갠지스강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떠올려 볼 수도 있다.

이렇게 한 나라에서 역사, 문화, 자연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이유는 시바신의 은총이라기보다 저렴한 물가 덕이다. 흔히 유럽에서 1달 여행할 돈이면 인도에서는 3개월을 여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인도에서는 히피풍 알록달록한 바지를 입은 초췌한 몰골의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은 저렴한 물가가 주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장기여행자들이다.

나 역시 그런 인도의 흔한 장기여행자 중 하나였다. 아끼고 또 아껴 가능한 길게 여행을 하며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싶었다. 하지만 단 한 번, 가난한 여행자의 신분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다. 인도의 휴양지 마테란에 갔을 때였다.

인도 휴양지 마테란... 뜻밖의 '신분상승'
인도인들의 휴양지 마테란 영국 식민지시절 때 개발된 대표적 산간휴양지다 ⓒ 정효정
마테란의 전망대 많은 볼거리보다는휴양하러 가기 딱 좋은 곳이다 ⓒ 정효정
마테란은 뭄바이에서 90km 거리에 있는 해발 800m의 산간피서지 마을이다. 이곳은 자동차가 없다. 인도 정부에서 생태보존을 위해 그렇게 지정했다고 한다. 자동차가 없는 대신 마차와 말이 주요 교통수단이다. 바로 이 '말' 때문에 마테란에 가기로 결심했다.

오랫동안 말을 타는 것을 동경해 왔다. 정확히는 말을 타고 초원을 질주하는 꿈이다. 그 꿈을 위해 실제로 승마 레슨도 받아봤다. 하지만 한국에서 아무리 승마가 대중화되었다고 하지만 내겐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회당 10여만 원의 레슨비도 부담이었지만, 승마장이 시외에 있다 보니 나 같은 뚜벅이에게는 접근 자체가 힘들다.

그렇게 포기했던 말 달리는 꿈. 하지만 한 여행자로부터 마테란에 가면 단돈 5달러에 승마가 가능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마테란은 인도인들의 휴양지로 유명하지만 외국인 여행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었다. 한국 가이드북에도 안 나와 있고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가봤다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하지만 말을 탈 수 있다는 말만 믿고 그곳으로 향했다.

마테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숙소마다 방이 없었다. 하필 인도의 3대 축제 중 하나인 디왈리 축제기간이었다. 디왈리 축제는 풍요의 여신 락슈미를 기리는 축제로 10월에서 11월 사이에 열린다. 이 축제기간에는 학교도 3주간의 긴 방학을 하고 직장인들도 휴가를 내서 고향을 방문하거나 여행을 간다. 때문에 빈방이 없는 거였다.

하지만 모든 숙소가 방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방이 있을 법한 숙소에서도 한사코 방이 없다고 했다. 나중엔 하다하다 안 되겠어서 '정말 방이 없는 거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충격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빈방이 있어도 혼자 온 여자는 안 받아."
"왜?"
"혼자 온 여자는 자살할 수도 있거든."

'아 참, 여긴 인도지.' 어이가 없지만 따져묻는 것을 포기했다. 이 나라에서 여자가 혼자 여행하는 것은 '자살을 할 만한 사연 정도는 있어야 가능한 행동'인 거다. 결국 마을을 헤매다가 비싸 보이는 호텔에 들어섰다. 인도 휴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국 식민지 스타일의 방갈로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인도 할머니는 안경너머로 날 보며 미소지었다. 

"혼자 왔어?"

일단 내가 자살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 듯하다. 결국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날 받아주는 그곳에 묵었다. 평소 내가 묵던 숙소의 20배 정도의 가격이었다. 물론 인도 물가가 저렴하니 비싸봤자 유럽의 등급 낮은 호텔에 묵는 것보다는 저렴하긴 하다. 이곳은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이 이 지역을 휴양지로 개발할 때 만들어진 유서 깊은 호텔이었다.
마테란의 오후 호텔 수영장에서는 계곡이 내려다보인다. ⓒ 정효정
마테란 호텔의 청소담당 할머니 외국인이 많지 않은 곳이라 할머니들의 사랑과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 정효정
호텔은 기대이상으로 멋졌다.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수영장이 있고 식당에 가면 흰색 냅킨을 한 팔에 걸친 웨이터가 정중히 4코스의 식사를 내왔다. 오후에 전화를 한 통 하면 애프터눈 티가 내 방으로 배달됐다. 심지어 인도식 짜이(향신료를 섞은 인도의 밀크티)가 아니라 다즐링산 고급 홍차였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옥상에 원숭이 똥이 즐비한 바라나시에서 가장 싼 숙소에 묵던 여행자였는데, 이곳에선 매일이 호화로움의 연속이었다. 마치 어렸을 때 읽던 책 <소공녀>에 나오는 이야기 같았다. 다락방 하녀 '소공녀' 사라가 어느 날 크리스마스 만찬을 선물 받은 그 뜻밖의 저녁처럼, 나는 매일 어느 좋은 집안의 '영애'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지냈다. 물론 이건 친절한 이웃집 아저씨의 호의가 아니라 내 여행경비의 대출혈이긴 했지만, 어찌하랴.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힘들 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그곳을 떠올린다
말 좋아해? 마을 광장에서는 손님을 기다리는 말과 마부가 항상 대기중이다 ⓒ 정효정
마테란의 마부들 주민 대부분이 말을 이용한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다 ⓒ 정효정
마테란의 가장 큰 자랑은 360도 파노라마뷰를 자랑하는 루이스 포인트에서 보는 일몰과 일출이다. 그 외 원트리 포인트, 몽키 포인트 등 다양한 전망대가 있고, 각 지점마다 원숭이가 관광객의 구운 옥수수나 빵을 노린다. 전망대는 걸어서도 갈 수 있지만 마을 광장에서 말을 타고 갈 수 있다. 그래서 마을 광장에는 언제나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말과 마부들로 복잡했다.

마부를 한 명 고용해 매일 아침, 저녁으로 말을 타는 조건으로 가격을 흥정하고 간단하게 말에 오르는 법부터 고삐 잡는 법, 평보와 속보를 배웠다. 하지만 말의 리듬에 맞춰 움직여야하는 속보가 바로 될 리가 없다. 그렇게 말이 움직이는 리듬과 반대로 움직인 결과, 피를 보았다. 꼬리뼈 언저리의 살갗이 안장과의 마찰로 벗겨진 거다. 

한국이었다면 엉덩이에 폭신한 패드가 부착된 승마바지를 살 수 있겠지만 이곳은 인도, 그 중에서도 전화도 안 터지는 산간벽지다. 고민 끝에 동네 잡화점에 가서 두툼한 생리대를 샀다. 그리고 꼬리뼈 부분에 생리대를 몇 겹 붙이고 말을 탔다.

이렇게 현실의 승마는 내 환상처럼 근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말을 타고 산 정상에 올라 일출과 일몰을 보는 기분만은 그럴듯했다. 승마에 익숙해지자 어느 정도 속도를 내는 것도 가능했다. 여전히 엉덩이는 아팠지만, 그래도 매일 말을 타고 맑은 공기를 가르며 숲속을 달리는 건 꽤 근사한 체험이었다.  
마테란의 원숭이 귀엽다고 방심하면 안된다. 원숭이한테 물리거나 할큄을 당하면 광견병주사를 맞아야한다 ⓒ 정효정
그렇게 꿈같던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1달러에 벌벌 떠는 배낭여행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세금 내는 성실한 생활인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가끔씩 사는 게 지리멸렬하고 궁상맞게 느껴지거나, 직장상사의 송곳같은 말에 찔려 쩔쩔맬 때 나는 마테란을 떠올렸다.

비록 지금은 매일이 너무 힘들지만, 꾹 참고 견디면 언젠가 다시 말을 타고 그 숲을 달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위안이 됐다. 마치 아버지의 죽음 후 갑자기 하녀신세로 전락했지만 "군인은 불평하는 법이 없어, 나도 그럴 거야, 난 지금이 전쟁 중인 척할 거야"라고 되뇌며 힘든 상황을 이겨내던 소공녀 사라처럼. 나는 힘들 때마다 눈을 감고 그 숲을 생각했다.

물론 그 이후로 마테란은 다시 가보지 못했다. 아직도 사는 게 전쟁이다보니... 언젠가 이 전쟁이 끝나면(아니, 최소한 휴전이라도 하면) 내 인생 최고의 여행지를 다시 찾길 바랄 뿐이다.
마테란 가는 법

인도 뭄바이에서 기차를 타고 네랄역에 간 후 (2시간 소요), '토이 트레인'이라고 불리는 산악용 열차를 타면 된다. 산악용 열차가 끊긴 시간에 도착한다면 합승택시를 타고 갈 수 있다. 단, 차량은 마테란 마을에 진입할 수 없기에 마을입구 4km 전에 내려 말을 타거나 걸어가야 한다.

태그:#사는게전쟁, #마테란, #여자혼자여행, #정신승리, #승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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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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