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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월 9월 26일 추석 귀성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서울역 광장<자료사진>
 1977월 9월 26일 추석 귀성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서울역 광장<자료사진>
ⓒ 문화체육관광부한국정책방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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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이틀 앞둔 24일 밤 서울역은 폭발 직전의 귀성객 인파 속에 날치기, 소매치기, 암표상이 들끓고 귀성객들은 개찰구를 빠져나가다가 밀리는 인파에 짓밟혀 30여 명의 부상자를 내는 등 난장판을 이루었다. 특히 콜레라 예방접종 없이 오염 지구에 마구 귀향해 방역대책에 허점을 드러냈다.

감기열(32·경남 창원군 북면 대산리)씨는 밀리는 인파를 정리하려고 마구 휘두르는 경찰봉에 머리를 얻어맞아 이마가 찢어져 피투성이가 됐다. 하오 8시 15분쯤 진주에 가려던 이종대(27)씨는 광장에서 백 속에 든 캐논 카메라를 날치기 당했다고 역전파출소에 신고했다가 바쁘니 나중에 오라는 경찰관과 옥신각신을 벌였고 박성엽(47)씨는 6개월 전 상경, 날품팔이 등으로 간신히 모은 8천 원을 소매치기당했다면서 고향에도 못 내려가게 됐다고 울상.

1969년 9월 25일 <경향신문>은 추석연휴 풍경을 이렇게 전합니다. 경찰이 인파를 정리한답시고 몽둥이를 휘두르는 게 당연했던 시절, 그 매를 맞아가면서도 가려고 했던 곳은 바로 고향입니다. 매번 하는 고생에 '귀향전쟁'이란 표현까지 붙었지만 매년 이 전쟁아닌 전쟁에 모두가 기꺼이 참전했습니다. 

10년이 흐른 1979년 귀향길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9월 22일 자 <동아일보>는 "21일 밤 8시경부터 서울역 광장에 몰려들기 시작한 8천여 명의 인파는 때마침 비까지 쏟아지자 우산을 펴들고 서 있거나 비를 피해 지하도나 육교 밑으로 서로 먼저 피해가려고 밀고 밀치는 소동을 빚었다"면서 "이날 공안원들은 혼잡이 빚어지자 5m짜리 장대로 사람을 마구 후려쳐 이를 항의하는 귀성객들과 다투기도 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들어나 봤나 '뱁새파', '진따파', '땜통파'

1971년 추석 귀성객 모습. <자료사진>
 1971년 추석 귀성객 모습. <자료사진>
ⓒ 행정자치부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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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려드는 귀향객에 신이 난 건 암표장수들이었습니다. 1974년 기사를 보면 당시 1450원이었던 광주행의 암표 가격은 3500원. 740원짜리 대전행 버스표는 4배가 넘는 3000원에 암표로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쏠쏠했던 암표 장사에는 공무원들까지 나섰습니다. 1979년 <경향신문>은 청량리역 철도 공무원들이 웃돈을 받고 암표상에게 표를 빼돌렸다가 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검거됐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암표를 팔아온 조직도 덜미가 잡혔는데 조직의 이름은 '뱁새파', '찐따파', '땜통파'였다고 하네요.

철도공무원들은 장당 300~400원의 웃돈을 받고 이들 조직에 표를 넘겼는데 이렇게 번 돈이 150여 만원이었다고 합니다.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1979년 공무원 보수규정을 찾아보니 당시 대통령 월급은 116만원이었고, 말단 '5을' 공무원은 7만6000원을 봉급으로 받았다니 꽤 큰돈이었던 셈입니다.

그나마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은 알아서 표를 챙기던 시절이었습니다. 1999년 8월 27일 <한겨레>에는 "공식창구를 통하지 않은 명절 열차표 예매를 이번 추석부터 전면 중단하기로 했다"며 "방침을 어기고 표를 빼돌리는 직원은 규정에 따라 징계할 것"이라고 선언한 당시 철도청장의 엄포가 보도됐습니다. 그런데도 각 관련 기관과 특정 언론사에서는 '정말 방법이 없느냐'는 압력성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는 깨알 같은 설명과 함께요.

서글펐던 IMF 고향길...고향행 대신 해외행은 언제부터?

1990년 9월 1일 추석 귀성 고속버스 승차권 예매를 위해 많은 시민들이 몰려 장사진을 치고 예매순서를 기다리고있다. <자료사진>
 1990년 9월 1일 추석 귀성 고속버스 승차권 예매를 위해 많은 시민들이 몰려 장사진을 치고 예매순서를 기다리고있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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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 IMF 경제 위기는 고향 가는 즐거움도 앗아갔습니다. 1998년 10월 4일 <경향신문>은 당시의 우울한 시대 상황을 소개합니다. 허리띠를 졸라맨 기업체는 관례처럼 제공하던 귀향 버스 지원을 중단합니다. 부평공단에서 일했다던 이순규씨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갈 때면 10시간 걸려도 지루한 줄 몰랐는데 IMF가 그런 즐거움마저 빼앗아갔다"며 우울해 했다고 하네요.

최장 9일까지도 쉴 수 있다는 올해 추석에는 그만큼 해외로 눈을 돌린 사람들도 많아서 최대 140만 명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해외로 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이야 이렇게 해외를 가는 게 별스런 일이 아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죠. 1989년 8월 1일 해외여행 자유화를 골자로 한 여행법 시행령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말입니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고 처음 맞은 추석, 한 여행사는 신문에 '추석 및 가을맞이 해외여행 대감사제'라는 광고를 대대적으로 게재합니다. 당시 가격을 보면 5박 6일 싱가포르·발리 상품 가격이 81만 2000원, 방콕 4박 5일은 59만9000원입니다. 지금과 비교해도 결코 싼 요금이 아닌데, 한국은행 경제통계 자료를 들춰보니 그 해 1인당 GNI(국민총소득)는 5718달러(현재 환율로 640만원 가량)였다고 하네요.

그런데도 해외를 나가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1989년 9월 12일 <매일경제>는 "추석연휴를 이용, 해외여행에 나서는 사람들도 급증 일부 여행사의 경우 동남아 일본 등 3~4일의 단기간 여행코스 예약이 이미 끝난 상태"라고 전했습니다.


태그:#추석, #귀향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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