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축구연맹(FIFA)의 회장이었던 줄 리메는 1928년 5월 암스테르담에서 올림픽과는 별개의 축구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존의 올림픽은 국제축구연맹에 속한 모든 국가에서 아마추어와 프로 선수들이 모두 출전할 수 있는 대회였으나 줄 리메의 새로운 도전은 신바람을 일으켰다.

이어진 총회에서는 찬성 25표와 반대 5표로 대회의 개최 여부가 가결되며 월드컵이 탄생했다. 이후 바르셀로나 총회에서 다시 모인 국제축구연맹은 4년마다 한 번씩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으며 우승 트로피의 이름을 '줄리메 컵'이라고 지었다. 개최국은 '아드리안 바렐라'가 주도한 우루과이가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당시의 우루과이는 1928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세계 최강팀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새로운 경기장을 건설하여 월드컵 성공 개최에 기여하기로 하였고, 우루과이 당국에서도 각 출전 국가에 지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여러모로 조건이 성립한 우루과이는 첫 월드컵의 개최국으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사실 국제축구연맹의 속내는 잉글랜드가 월드컵을 개최해주길 바랐다. 축구의 종가인 그들이 첫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축구의 대중화를 이끌어주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잉글랜드는 연맹에 속하지도 않았으며, 독자적인 연맹 'FA'를 운영하면서 월드컵 출전조차 포기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월드컵에 출전하지 않기로 했는데 남미에서 대회를 개최한다는 이유와 금전적 상황 때문이었다.

반면 아메리카 국가들은 대회를 크게 반겼다. 무려 8개의 아메리카 국가가 대회에 출전하며 역사적인 월드컵의 첫 스타트를 끊었다. 유럽 국가들은 대회 두 달 전까지 누구도 출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축구 연맹의 회장인 '프랑스인' 줄 리메가 개입하면서 네 국가가 출전했다. 프랑스를 비롯해 루마니아, 벨기에, 유고슬라비아가 극적으로 배에 탑승하며 조금이나마 대회가 풍성해질 수 있었다.

여기서 잠깐! 이색적인 축구 이야기 ①

 월드컵 결승전에서 득점하는 카스트로.

월드컵 결승전에서 득점하는 카스트로. ⓒ 위키백과


출전 의사가 없었던 루마니아는 새롭게 국왕 자리에 오른 카롤 2세의 지시에 따라 출전했다. 카롤 2세는 콘스탄틴 러둘레스쿠 감독 아래 선수단의 명단을 직접 작성했고, 선수단은 일반 아마추어 선수들로 이루어졌다. 선수들은 자신의 생업을 갖고 있었지만 카롤 2세가 고용주들을 설득했다. 고용주들은 전부 선수들의 차출을 허가했고 극적인 출전이 가능했다.

유럽의 국가들은 콩트 베르디호에 탑승해 우루과이로 이동했다. 콩트 베르디호에는 루마니아와 프랑스 대표팀, 심판 4명과 국제 축구 연맹의 간부들까지 많은 축구인들이 동시에 탑승했다. 이 배는 리우에 들려 브라질 대표 팀까지 태워서 우루과이로 이동했다. 현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독특한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대회는 13국가가 네 개의 조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이들은 라운드 로빈 방식(각 팀이 같은 조에 속한 다른 팀과 모두 한 번씩 경기를 치르는 방식)으로 조별예선을 치렀다. 이어 각 조의 1위 국가들이 준결승전을 치렀고, 승자들이 다시 결승전을 치렀다. 당시는 현재와 다른 승점 제도로 대회에 임했다. 승리를 거둔 국가는 승점 2점, 무승부는 승점 1점, 패배는 승점 0점을 가져가게 되었다.

각 조는 모든 국가가 몬테비데오에 도착했을 때 추첨했다. 그리고 대회는 프랑스와 멕시코, 미국과 벨기에의 경기로 시작됐다. 대회 첫 골의 주인공은 루시엥 로렌이었다. 프랑스는 찬트렐의 패스를 받은 리베라티가 크로스를 올렸고, 멕시코 수비진 사이로 돌파한 로렌이 발리 슈팅으로 득점했다. 멕시코의 본피글리오 골키퍼는 영문도 모른 채 실점하며 월드컵 역사상 첫 실점을 기록했다.

대학교 법학 시험을 위해 월드컵을 포기한 남자

 초대 득점왕, 기예르모 스타빌레

초대 득점왕, 기예르모 스타빌레 ⓒ 위키백과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주장이었던 마누엘 페레이라는 놀랍게도 대학교 법학 시험을 위해 월드컵을 포기했다. 칠레를 상대했던 첫 경기를 치른 후, 그는 학교가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갔다. 경기를 치르면서도 법학 시험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월드컵 반짝 스타가 탄생했다. 마누엘 페레이라의 후보였던 기예르모 스타빌레는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6-3 대승을 이끌었다. 이어진 최종전에서는 칠레를 3-1로 꺾었고 아르헨티나를 4강으로 이끈 주역이 되었다. 마누엘 페레이라는 법학 시험을 응시한 후 다시 우루과이로 출국하여 월드컵 선수단에 합류했다. 그러나 페레이라의 자리에는 이미 '스타빌레'라는 스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아르헨티나는 페레이라를 측면에 기용했고, 스타빌레는 그대로 최전방 공격수에 두었다. 스타빌레는 준결승에서 미국을 지배하며 6-1로 대승했다. 4경기 동안 7득점을 올리며 유력한 득점왕 후보로 자리 잡기도 했다. 마누엘 페레이라는 은퇴 후 가게 점원으로 일하다가 월드컵 중계를 맡기도 했다. 이어 1983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 '법학 시험'으로 회자되고 있다.

준결승에는 아르헨티나와 미국을 비롯해 우루과이와 유고슬라비아가 올랐다. 놀랍게도 준결승 두 경기에서는 같은 결과가 나왔다. 아르헨티나는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을 6-1로 이겼다. 우루과이는 페드로 세아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유고슬라비아를 6-1로 이겼다. 이에 결승전은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만나게 되었다. 항해를 통해 체력적 소모가 컸던 유럽 국가들은 모두 탈락했다. 결국 결승전은 남미 팀들이 만났다. 놀랍게도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1928년 올림픽 결승전을 치렀던 국가다. 당시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를 꺾고 금메달을 따냈던 바가 있다. 아르헨티나는 이를 갈고 설욕전을 준비했다.

 결승전에 출전하는 선수들. 아르헨티나(좌) 우르과이(우).

결승전에 출전하는 선수들. 아르헨티나(좌) 우르과이(우). ⓒ 위키백과


결승전은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위치한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경기장에서 펼쳐졌다. 센테나리오 경기장은 대회를 앞두고 새롭게 지어졌으며 관중을 9만 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다. 경기에 앞서 경기장은 관중들로 꽉 찼다. 역사적인 첫 월드컵의 우승을 가리는 결승전이니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잠깐! 이색적인 축구 이야기 ②

약 1만5000명의 아르헨티나 축구 팬들은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배를 타고 출국했지만 대부분이 경기장에 도착하지 못 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우루과이까지 가는 사이 경기는 이미 끝나있었다. 아주 극소수의 팬들은 열 대의 보트를 타고 몬테비데오에 도착했다. 반면 많은 팬들은 몬테비데오에서 무기 소지 여부 수색을 받다가 뒤엉켜 시간을 보냈다.

전반전은 아르헨티나가 앞서갔다. 우루과이의 도라도가 보타소 키퍼의 다리 사이로 낮은 슈팅을 때리며 먼저 득점했지만 아르헨티나가 역전하는데 성공했다. 페레이라의 스루 패스를 받은 페우셀레는 드리블로 수비를 제친 후 강한 슈팅으로 골문을 흔들었다. 이어 스타빌레가 전반 37분에 득점했다.

하지만 후반전의 분위기는 전반전과 달랐다. 경기력이 살아난 우루과이가 연거푸 3득점을 올렸다. 준결승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한 세아가 동점골을 넣었고, 후반 68분에 산토스 이리아르테가 30m 득점을 성공시켰다. 89분에는 우루과이의 최전방인 카스트로가 헤딩 득점하며 정점을 찍었다. 이렇게 첫 월드컵의 우승 국가는 우루과이로 결정되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우루과이 영사관을 향한 돌 던지기가 유행했다. 한편 우루과이는 경기 다음 날인 7월 31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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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 월드컵 1930년 월드컵 초대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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