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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닭가슴살 댄스위치라니...

Puedes cosinar este comida sin el carne porfavor? Yo soy vegeteriana.
이 요리를 고기 빼고 만드실 수 있나요? 저는 채식주의자입니다.

닭도리탕 맛과 똑같은 볼리비아의 매운 닭고기 요리
 닭도리탕 맛과 똑같은 볼리비아의 매운 닭고기 요리
ⓒ 조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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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일주 중 90일 정도 중남미를 여행하기로 했다. 출국 3개월 전부터 온라인으로 스페인어 강의를 들으며 음식과 요리 관련 문장을 외웠다. 특히 "고기 빼고 요리 부탁드려요"라는 문장을 열심히 외웠다. 중남미에 가면 온통 고기뿐이라고 여행자들이 입을 모아 말했지만, 3년 동안 페스코 테리안(해산물, 유제품은 먹되 닭, 돼지, 쇠고기 등은 먹지 않는 채식 단계)이였으니 현지에 가서도 같은 식습관을 이어가려 했다.

결심은 도착 1주일 만에 무너졌다. 해발 2700미터, 북한산 높이의 3배 이상인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서 3박 4일 트레킹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트레킹 마지막 날, 7시간을 더 가야 국립공원 출구가 나왔다. 가져온 식량은 바닥났고, 산장에서 파는 야채 맛 컵라면은 하나에 2만 원쯤 했다.

전날 저녁에 먹은 거라곤 아보카도 한 개, 오이 한 개, 딱딱하게 굳어버린 모닝 빵 한 개가 전부였다. 이미 허기가 질대로 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2만 원짜리 컵라면을 먹을 수도 없는 노릇. 빈속에 7시간 동안 하산할 일이 무서워 산장의 같은 방을 썼던 미국인 노부부에게 배고파 죽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내 하소연을 들은 노부부는 산장에서 산 닭 가슴살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자신들은 돈이 많아서 또 사 먹으면 된다며.

노부부에게 정말로 고마웠지만, 하필 닭 가슴살 샌드위치라니. 오로지 고기가 들어간 샌드위치만 파는 산장이 짜증 났다. 고기를 빼고 소량의 야채와 빵만 먹자니 배가 전혀 부르지 않을 게 뻔했다. 잠깐 고민을 했지만 이미 다리는 덜덜 떨렸고 빈속으로 하산할 수는 없어 눈 딱 감고 닭 가슴살 샌드위치를 먹었다. 동물의 고통을 먹고 있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일단 살고 봐야 했다. 먹지 않으면 정말 가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발을 헛디딜 것 같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딱딱한 닭 가슴살에서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다행히 몸은 3년 만에 처음 먹은 닭고기를 아무 문제 없이 소화했다. 몸이 '2700미터 산길을 걸어야 하니 투정부릴 때가 아니야'라고 무의식적으로 인식한 걸까.

고기를 먹긴 했어도 칠레에서는 어쩌다 한 번 있는 일이었다. 칠레의 비싼 물가 때문에 외식을 자제하고 호스텔에서 혼자 토마토 스파게티를 해 먹으며 버텼다. 다른 여행자들과 어울리지 않은 건 귀찮아서이기도 했고, 누군가와 같이 어울리면 외식을 해 돈 쓸 일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했다. 혼자 호스텔에서 별맛도 없는 토마토 스파게티를 씹는 일이 계속되자 외로웠다. 이게 여행인지, 고행인지 헷갈렸다.

물가가 저렴한 볼리비아를 여행하며 여행의 태도를 좀 바꿔 보기로 했다. 호스텔에서 친구를 사귀어 외로움을 달래는 게 급선무였다. 호스텔에서 만난 네덜란드 친구 안나케이와 볼리비아의 수크레라는 도시를 나흘동안 여행했다. 안나케이는 현지식당은 불결하고 믿을 수 없다며 서양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다소 비싼 채식 식당에 자주 가길 원했지만, 나는 불결해도 괜찮고 고기를 먹어도 어쩔 수 없으니 현지인들이 가는 저렴한 재래시장 식당에 가길 원했다.

육식으로 인한 갈등은 계속됐으나, 관광객들만 가는 고급식당에서 '호구 관광객'이 되긴 싫었다. 결국, 안나케이를 설득해 가끔 재래 시장의 1700원짜리 닭고기 수프를 먹으러 갔다. 나의 몸은 계속 아무 이상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몸은 은근히 동물성 단백질을 바라던 걸까?

고기를 먹어도 이상없던 몸, 마침내 탈이 나다

볼리비아 재래시장의 정육점
 볼리비아 재래시장의 정육점
ⓒ 조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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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프기 시작한 건 볼리비아의 뽀꼬뽀꼬라는 작은 마을을 방문했을 때다. 공정 여행가 한영준씨가 뽀꼬뽀고에 세운 희망꽃 학교를 후원자 자격으로 4박 5일 동안 방문했다. 뽀꼬뽀꼬에서 거의 내내 학교 선생님들이 주는 밥을 먹었다. 전기만 간신히 들어오는 오지라 내가 가져간 소량의 빵과 견과류, 동네 구멍가게의 간식 말고는 음식을 구할 길이 없었다.

아침은 다행히 주민들이 준 과일을 먹었지만, 점심에는 닭볶음탕과 맛이 똑같은 닭요리가 자주 나왔다. 저녁에는 얇게 저민 냉동 돼지고기와 흰쌀밥이 주메뉴였다. 선생님들은 많이 먹으라며 내 접시에 고기를 더 얹어 주기까지 했다. 사이드 메뉴는 오로지 삶은 감자뿐. 하루 중 섬유질을 섭취할 수 있는 때는 오로지 아침뿐이었다. 바야흐로 하루 두 끼 육식의 시간이 도래했다.

결국, 뽀꼬뽀꼬에서 지낸 이틀째 밤, 밤새 잠도 못 자고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설사는 아침 동이 뜰 때쯤 멈췄다. 입에선 계속 고기 누린 맛이 났다. 다음 날 점심 메뉴는 여전히 닭고기였다. 아랫배는 묵직했고, 방귀는 멈추지 않았다. 영양사 선생님은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그릇에 닭고기를 자꾸만 더 담아줬다. 말도 안 통하는 마당에 영양사 선생님의 호의를 "채식주의자여서 닭고기 못 먹어요"라며 거절할 수 없었다. 뽀꼬뽀꼬를 떠나는 날까지 몸은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왜 남미 사람은 채소를 거의 먹지 않는 걸까? 볼리비아 사람에게 물으니 단순한 답변만 돌아온다. '육식, 감자, 옥수수 위주의 식단이 전통이며 고기가 채소보다 더 맛있다.' 현지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볼리비아의 경우 농지가 많지 않았다. 초원지대가 적고, 자갈과 모래 산이 많아 농사보다는 염소나 돼지 치기에 적합했다. 감자는 원래 남미가 원산지인 만큼 남미의 척박한 토양에 적합한 작물이다. 육식과 탄수화물 위주의 식단이 전통일 수밖에 없다.

볼리비아의 오지마을에서는 황폐한 토양 때문에 농사 짓기가 힘들어 돼지를 치는 집이 더 많았다.
 볼리비아의 오지마을에서는 황폐한 토양 때문에 농사 짓기가 힘들어 돼지를 치는 집이 더 많았다.
ⓒ 조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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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가 채소보다 더 맛있다는 것은 개인의 문화적 기준이다. 만약 남미 사람 중 고기를 고통스럽게 죽어간 동물의 도축된 사체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고기가 맛있다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관점을 가진 남미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았다.

남미에서 그나마 잘 산다는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여행했을 때, 한 마을에 수십 마리의 유기견들을 봤다. 유기견들은 바싹 말라 앙상하고 다리를 절었다. 남미의 최빈국 볼리비아의 상황은 더 끔찍했다. 중성화 수술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서 암캐가 첫 출산을 하면 더 새끼를 불리지 못하게 물에 던져 죽였다. 대부분의 남미사람은 동물 보호에 관심이 적었고 채식이 환경에 주는 이점 자체를 몰랐다.

상황이 이러하니 남미는 채식주의자인 나에게 무덤처럼 느껴졌다. 내 몸은 봄을 맞아 한국에서 3월마다 먹던 두릅, 냉이, 돌나물을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이는 닭고기를 씹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건 상큼하고 씁쓸한 두릅이다'라며 최면을 걸었다. 중미인 쿠바까지 합해, 아직 남미 여행은 2개월이나 더 남았다. 과연 나의 위장은 남미의 육식 문화와 한판 전투 끝에 어떤 결과를 낼까. 결과가 어쨌든 미국으로 넘어가 다시 채식주의자가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태그:#세계일주, #지속가능성, #남미여행, #남미, #채식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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