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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열풍'을 넘어 '페미니즘 유행'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서 여성주의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차별이 일상에 공기처럼 스며들어있고, 젠더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게 여전히 낯선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학교 같은 공간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 환경에서 '성평등'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페미니스트로 자라나는 것, 그리고 페미니스트를 키워내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각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불혹 남성의 자아검열

젠더로 그리기
▲ 마을 바람이 불어오는 곳 젠더로 그리기
ⓒ 마을과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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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서울시 강동구에서 뜻깊은 행사가 하나 마무리됐다. 작년 가을에 이어 진행한 강좌 '마을 바람이 불어오는 곳 - 젠더로 그리기'가 바로 그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마을과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활동가들이 강좌를 들었다.

작년 여름, 지역의 몇몇 여성 활동가들이 '마을과 여성' 강좌 기획팀으로 나를 초대했을 때만 하더라도 솔직히 어안이 벙벙했다. 지역의 여성들이 젠더와 관련하여 나를 그나마 '깨인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에 기분이 좋긴 했지만, 그보다 부담스러운 마음이 먼저였다.

내가 그들의 생각대로 젠더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인지 자신할 수 없던 탓이었다. 혹자는 사회적경제 분야로 직장을 옮긴 뒤, 아내가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외조하는 만큼 젠더 감수성이 높다고 하지만 당장 나부터 그것이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갖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비록 진보적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대한민국의 가부장적 구조가 잔존해 있는 가정에서 남성으로 태어나 남중, 남고를 나오고 군대를 제대한 뒤 군사 조직문화가 그대로 남아있는 기업을 다녔던 불혹의 남성. 과연 내가 이 자리에 어울리는 걸까?

교육을 통해서 세상은 바뀐다 조금씩
 교육을 통해서 세상은 바뀐다 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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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난 모임을 나오면서 성평등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해야 했고, 함께하는 여성들 앞에서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자아 검열했다. 그것은 젠더를 운운하는 남성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무슨 생각과 말을 해도 결코 편안하지 않는 자리. '이렇게까지 하면서 굳이 마을과 여성이란 모임에 참여해야 할까'라는 자괴감이 들 무렵, 내게 용기를 준 것은 모여 앉은 사람들의 자기고백이었다. 우스갯소리로 '간증'이라고도 표현했지만, 젠더와 관련하여 말문이 트이자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들을 앞다투어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굳이 꺼내기 쉽지 않은 주제들이었고, 그만큼 자주 해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입을 통해 직접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치유의 과정이었으며,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의 어깨를 짓눌러온 가장의 무게를 새삼스럽게 꺼냈으며, 여성들이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이 상상 외로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렇게 자기고백들이 끝나자 '마을과 여성'의 동력이 그제야 갖춰진 느낌이었다. 지금 우리가 느낀 이 소소한 해방감을 좀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강좌 기획을 시작했고,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감히 주민들을 대상으로 페미니즘 수업을 열고자 했다. 

마을과 여성

젠더로 나를 성찰하기
 젠더로 나를 성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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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우리는 마을에 집중했을까? 마을은 젠더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공간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데 있어서 마을이 주요 단위인 만큼,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 학습된 성역할을 마을에 가장 쉽게 적용한다. 어린 아이들은 동네 어른들을 보면서 다시금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익혀가며, 어른들은 마을 활동을 통해 자신의 성역할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

혹자들은 현대에 와서 사회가 급속도로 도시화되고 공동체가 해체됨에 따라 마을이 무슨 큰 의미가 있냐고 반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여전히 중요하다. 아무리 SNS가 발달해 새로운 형태의 커뮤니티가 등장하더라도 대면 접촉을 기반으로 한 물리적 형태의 마을을 대체하기란 쉽지 않다. 당장 우리의 아이들은 집 가까운 학교를 다니고 시장에서 장을 보며, 동네 이웃들과 인사를 하고 있지 않는가.

더욱 주목할 점은 최근 각 지역에서 마을공동체 조성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나만 잘 살 것이 아니라 마을이라는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인식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의 지자체들은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지원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진선미 의원의 정치로 젠더 그리기
 진선미 의원의 정치로 젠더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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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이런 마을공동체 활성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체이다. 마을에서 교육을 하거나 사업을 진행할 때 여성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아직도 남성이 가계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은 사회적 구조와 출산과 육아라는 특수한 조건 때문에 여성이 마을 활동에 더 활발히 참여한다.

따라서 마을에서 젠더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여성 주체가 훨씬 많은 마을에서 여성이 객체화되지 않고 주요 리더로 서기 위해서는 기존의 성역할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깨달아야 하며, 성평등을 지향하는 젠더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아주 오랫동안 대표적인 지역 사회 운동으로 자리매김 되어 왔던 새마을 운동을 떠올려 보자. 새마을 깃발 아래 문고를 지키거나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하는 것은 새마을 부녀회 여성이요, 그 앞에서 정장을 차려입고 정치인들과 사진을 찍었던 건 대부분 남성 아니었던가. 다시금 붐이 일고 있는 마을 공동체가 이와 같은 기존의 질서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는 젠더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젠더로 그리기

영화로 젠더그리기
 영화로 젠더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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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마을 바람이 불어오는 곳 - 젠더로 그리기'는 세 개의 강좌로 진행되었는데, 첫 번째 수업을 맡은 신하영옥 인권연대 활동가는 수강생들에게 젠더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내가 그릇된 생각으로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를 재생산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젠더의 관점에서는 편견이 아니었는지 짚을 수 있었다.

두 번째 강사는 강동에 지역구를 두고 있는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다. 그는 순창의 순박한 소녀가 어떻게 호주제 폐지에 앞장 선 변호사를 거쳐 국회의원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 어떤 성차별을 겪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사람들은 젠더 정체성이 30개가 넘는다는 이야기에 우선 놀랐는데, 진 의원은 그렇게 책으로만 젠더를 공부했던 자신이 여성 정치인으로서 현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혔고, 다시금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지막 수업은 영화로 젠더를 그리는 시간으로 <그녀들의 점심시간>이란 영화를 감상한 뒤 구대희 감독과 함께 우리 사회의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독은 영화에서 전혀 특별하지 않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성 10여 명의 점심식사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어떻게 차별받고 있는지 보여주었으며, 또한 젠더와 계급이 어떻게 얽혀있는지 화두를 던져주었다.

감독과의 대화
 감독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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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세 강좌를 통해 마을에서 당장 여성이 주체로 설 수는 없다. 가부장적 구조를 해체하고 젠더 감수성을 높이는 것 역시 요원하기만 하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다음은 20년 넘게 새마을 문고에서 열심히 일을 해오다가 최근 마을공동체와 사회적경제 영역을 처음 접한 여성 활동가의 소감이다.

"그동안 이런 게 있는지 전혀 몰랐어요.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주위에도 이야기 해줘야겠어요."

세상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오랫동안 꿈을 꾸면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마을과 여성'의 다음 강좌는 가을이다.


태그:#페미니즘, #마을과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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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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