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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 정찬대 지음, 한울아카데미 출판
▲ 책 표지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 정찬대 지음, 한울아카데미 출판
ⓒ 한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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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호남·제주 편'이라는 부제를 보고, 역순으로 읽어도 되겠다 싶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학살 기록들을 연대순으로 보면 제주가 가장 먼저고, 그 다음이 호남 지방이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은 아직까지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꺼내기가 쉽지 않은 이야기임을 고향인 제주에서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어릴 적 제주에서는 제삿날마다 밖에 인기척이 있는지 흠칫흠칫 살피며 조심스레 이야기하던 어른들이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잘못 이야기했다가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모른 척하고 묻어두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진실을 구술하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도리라고 여기는 듯했다.

특별히 마을 전체가 제삿날이던 연말이면 어른들은 더욱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른들은 성산 일출봉 우뭇개에서 죄 없는 사람들이 죽었던 날의 이야기를 하면서 누가 엿듣지나 않는지 헛기침을 하며 들려주곤 했다.

어른들 말에 따르면, 1949년 12월 29일, 우리 동네 강·고·김·송·오·홍 씨 집안의 스무 명이 서북청년단원들에게 일출봉 아래로 끌려가서 대창에 찔려 죽었다. 우리 동네만이 아니었다. 열흘 뒤인 13일엔 일출봉에서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터진목 아래에서 고성리 사람 28명이 역시 서청에 의해 학살되었다. 연말에 죽은 사람들은 해를 넘긴 1월 2일이 돼서야 보말(고동)이 더덕더덕 붙은 시체가 되어 가마니에 둘둘 말린 채 지게에 뉘어 돌아왔다.

몇몇은 바닷가에 둥둥 떠다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하나둘 건져졌을 땐 형체를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른들은 제삿날이면 서청의 독기 어린 시선을 뒤로 하고 염을 거든 사람이 누구였는지, 말도 섞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짚고 넘어갔다. 그런 시대를 산 사람들은 보릿고개를 넘던 이야기는 추억이 될 수 있었지만, 4·3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을 토해내는 순간이기도 했다.

제주 4·3 당시 우리 고모부는 폭도라 매도되던 산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다리 부상을 당하고 상이군경이 되었다. 둘째 이모는 해병대 최초 여군 중 한 명인 해병 4기였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독자였던 아버지는 자원입대했다. 그런 집안이었지만, 고모 중 한 명이 홍콩에 있다는 이유로 사복경찰들은 집안을 들락거리며 고모와 연락이 닿고 있는지 물었다.

당시는 중국과 영국 사이에 홍콩 주권 반환 교섭도 없던 때였다. 일말의 꼬투리라도 잡으려는 경찰의 시선은 서북청년단에 의해 집단 학살된 희생자들이 있는 동네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런 시절을 살았던 제주 사람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군대에 살기 위해 지원해야 했다. 또한, 일본으로 밀항한 아버지가 조총련에 가입했다는 이유 하나로 농사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제초제를 먹고 세상을 뜬 동네 삼촌은 4·3 이후 제주를 옭아매던 연좌제의 희생양이었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책을 읽으며 4·3을 구술하던 어른들과 책 속 화자들의 얼굴이 자꾸 겹쳐졌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저자 정찬대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응어리진 '한'을 풀 길 없어 어린 아이에게 묻어두었던 진실을 전하던 어른들을 저자는 이렇게 압축적으로 설명했다.

"전쟁은 전장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총칼을 든 군인들만의 몫도 아니다. 아군과 적군 사이에 끼어 있는 민간인들은 몇 곱절 이상의 피와 고통, 그리고 가슴 메이는 아픔과 살 떨리는 공포를 겪어야만 했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진짜 전쟁'이고 또한 '지옥'이다." -140쪽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책 속에도 똑같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더 감정을 추스르며 정제된 표현을 쓴다는 정도였다. 애월읍 양용해씨의 이야기다.

"1950년 8월 말, 아버지가 총살되고 얼마 안 돼 해병대에 지원했다. 좌익으로 몰려 죽느니 이편이 낫다고 보았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이 되레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 제주에는 한국전쟁 초기 적잖은 이가 해병대에 입영했다. 1950년 8월 5일과 30일 두 번에 걸쳐 징집된 해병 3·4기 2938명 가운데 95%가 제주 출신이며, 4기에서 처음 배출된 전투여군 해병 126명도 이곳 제주에서 나왔다." - 324쪽

양용해씨의 이야기에서 이모의 모습과 동네 삼촌의 얼굴이 떠올랐다. '좌익'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 전쟁을 택해야 했던 사람들과 달리 권력을 가진 이들은 빨갱이라는 말 한 마디로 누군가를 '죽여도 되는, 아니 죽어 없어져야 하는' 존재로 치부했다.

"장개석 총통의 말한 것처럼 명주 베에 붉은 물이 들면 빨아도 빠지지 않아. 어린놈 머리통에 빨갱이 물이 들면 별수 없어, 그냥 죽여야 해. 그렇게 취조가 끝났고, 다음 날 오전 검찰 구형과 함께 이날 오후 재판이 이뤄졌다. 그리고 광주형무소로 옮겨진 사형수들은 곧 있을 죽음을 기다렸다." -162쪽

이처럼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는 40여 년 전 제삿날에 듣던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했다. 지역을 불문하고, 좌우 대립 속에 이유도 모르고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4·3에 대해 낯선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면서도 핏줄들에게라도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속이 곪을 것 같아 조심조심 털어놓던 모습 말이다. 그 모습은 누군가에는 낯설고 믿기지 않을 이야기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진행형인 이야기다.

"고난행 씨는 생전에 4·3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싫어했다. 온몸으로 4·3과 마주했지만 그저 '반인륜적이었다'는 말 외에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고 씨는 새벽녘 보리밭에 일하러 들어가서야 남몰래 홀로 울었다. 죽은 아이가 가엾어서,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 흘린 눈물은 꺽꺽 소리와 함께 통곡이 됐다."-288쪽

저자 정찬대는 '누군가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버릴 개인의 역사'에 주목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절한 아픔과 읊조림에 귀를 기울였다. 국가폭력이 어떻게 정당화됐고, 역사가 어떻게 유린당하고 농락됐는지를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던 이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놓고 써내려갔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이 책은 역사 기록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이야기이며, 피해자들이 겪은 질곡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누군가의 삶이 또 하나의 역사가 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가슴 저미도록 아픈 우리 역사이자 통한의 기록'인지도 모른다.

그는 '정지된 시간 속에 살아가는 이들, 새카맣게 응어리진 슬픔과 한을 삼켜내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그들 모두를 다루지 못함을 비통해 한다. '한국전쟁 민간의 학살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는 호남·제주 편이 그 시작이다. 한국전쟁 전후 국가폭력의 집단적 광기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인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다룬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미완의 글이다.

스릴러 소설 작가인 B.A패리스는 그의 소설 <비하인드 도어>에서 "공포는 최고의 재갈이다"라고 했다. 이 책은 공포라는 재갈을 극복하고 진실을 알리려 한 이들의 용기와 한 많은 세월을 살아온 이들의 눈물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는 "애달픈 꽃처럼 살다간 이 땅의 모든 한 조각 역사에게 이 이야기를 바친다"고 했다. 결코 과거 이야기가 될 수 없는 현재의 이야기이며, 미래에도 다뤄져야 할 우리 역사의 한 부분에 귀 기울어야 할 것이다.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 - 호남.제주 편

정찬대 지음, 한울(한울아카데미)(2017)


태그:#민간인 학살, #한국전쟁, #제주4.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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