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영화 <킹스맨2: 골든 서클> 스틸 사진.

영화 <킹스맨2: 골든 서클> 스틸 사진.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위기의 순간에 영웅은 나타난다. 그들은 사회가 보듬치 않는 우리를 구원한다.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뽐내려 하지 않는다.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의무를 다할 뿐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마블(Marvel Comics)'이 없다. 이따금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시민이나 불이 난 건물에서 아이를 구하는 영웅이 등장하곤 하지만, 그들이 사회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울분은 삼켜지고 분노는 억압된다. 냉랭하고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불투명한 가운데, 간간이 들려오는 시민영웅들의 소식만이 아직 사회가 완전히 경직된 것은 아니라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위기감 속에서 사람들은 꿈을 꾼다. 이루어질 수 없거나,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 꿈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나와 현실에 스며든다. 예술은인간의 상상력을 현실에 재현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꿈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 지나온 길을 되짚거나, 앞으로 나아갈 미래를 제시한다. 그리고 허황된 꿈을 꾸며 불안을 쫓아내고자 한다.

킹스맨 시리즈는 이러한 꿈에서부터 출발한다.영화는 기존의 영화나 시대적인 맥락에 '반'하는 영화다. 킹스맨시리즈는 기존에 있던 스파이 장르 영화 '007 시리즈'의 안티테제다. 영화는 자칫하면 진부해질 수 있는 '날 선 비판'이 아닌, '따가운 고무 칼'을 사용해 시대적 모순을 비꼬고 있다. (여담이지만 킹스맨의 감독 매튜 본은 이전에도 <엑스맨>과 <킥애스>와 같은 반영웅 영화를 만든 적 있다.)

거대한 괴물에게 고무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용사를 상상해보자. 그 고무 칼은 휘두를 때마다 쫄깃한 소리를 내며 빛이 나고 있다. 어린 아이들 장난감 같은 칼에 어이가 없어진 괴물은 용사에게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머쓱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용사를 비웃는다. 그러나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던 행인은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상황이 웃기기만 하다.

개인은 약하지만 단체는 강하고, 영화는 단체에 가담해 시대를 비판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영화의 '비주류적' 성향은 그들을 (시대비판)단체 속의 개인으로 보이게 하고, 우리도 그들을 보며 '단체(주류사회) 속의 개인'으로써 시대에 대항할 힘을 얻는다. 이렇듯 영화의 B급 성향과 블랙 코미디적 요소는 '괴물에게 대항할 힘'이 아니라 '괴물을 공격하면서도 공격받지 않을 힘'이다. 이례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유머가 진통제처럼 현실의 아픔을 덜어 맞서 싸울 용기를 준다. 그럴 뿐만 아니라, 괴물로부터의 관심을 돌리는 연막의 역할도 한다.

영웅

<킹스맨>속의 인물들은 영웅이다. 그들은 시민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 '몰래' 세상을 구한다. 일종의 첩보원인 셈이다. 킹스맨이라는 설정은 '영국'이라는 나라를 대표하는 '신사'에서 유래한 동시에 영국의 설화인'아서 왕 전설'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신사에게 걸맞은 것들이다. 우산과 라이터, 구두와 정장과 같은 도구들은 그들의 점잖음을 연기하는 도구다

신화화에서 비롯된 우상화를 지적할 수 있다. <킹스맨 시리즈>가<007 시리즈>의 안티테제로 기획되었다는 것을 보면, 미묘한 변용의 지점을 알 수 있다. <007>이이전까지 은밀하고 신비한 신격화된 적군의 이미지로 스파이를 그려내었다면, <킹스맨>은 이것을 물려받아 정숙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탈 신화화'로서의 스파이를 그려낸다. 즉, 킹스맨에서의 스파이는 신사적인 겉모습과는 다르게 비신사적인 방법으로 적을 제압한다. 이러한 변용이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복장(이미지)과역할(텍스트)의 불일치를 보여준다.

독재의 상징

 영화 <킹스맨: 골든 서클>의 한 장면. 에그시(태런 에저튼)와 해리(콜린 퍼스)는 스테이츠맨 요원 위스키(페드로 파스칼)과 함께 포피가 가진 해독제를 찾으러 스키장에 온다.

영화 <킹스맨: 골든 서클>의 한 장면. 에그시(태런 에저튼)와 해리(콜린 퍼스)는 스테이츠맨 요원 위스키(페드로 파스칼)과 함께 포피가 가진 해독제를 찾으러 스키장에 온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세상이 크게 변하지 않은 만큼, 두 영화의 핵심 코드들도 비슷하다. 가령, <킹스맨>에서 사람들의 머리가 터지는 것을 알록달록한 폭발구름으로 대체한 장면은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을 떠오르게 한다. 여러 인물들(무능한 정치인들)에서 나온 하나의 구름(핵버섯 구름)과 하나의 인물(악당발렌타인)에서 나온 여러 구름(칩 폭발), 두 영화의 이러한 차이점은 두 영화의 대비를 선명하게 하는 동시에 실질적 독재자의 출현을 경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해 고안된 체계지만, 명령 체계를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한 인물에게 권력이 집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정치인의 우상은 대통령이고, 그것은 악당 발렌타인이다. 정치인들의 '명령체계'와 악당 발렌타인의 '베리 칩'은 개인이 다수를 통제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핵 문제는 이러한'권력'을 가진 사람이 '분산된권력'의 사람들 탓에 현명한 판단을 저지받거나 현명하지 못한 판단을 지지받는 것에서 온다.

말하자면, 문제는 막대한 책임을 수반하는 판단이 과거처럼 하나의 권력자에 의하여 통제된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는 과거처럼 핵위협이 직접 다가오지는 않지만, 그 양과질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두 작품에서 하나의 폭발(닥터스트레인지러브)과 달리 여러 폭발(킹스맨)이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핵이라는 도구가 얼마나 확산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폭발 장면은 권력에 대항하는 군중의 모습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현대사회에서 혁명은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진영대립, 혹은 이념대립

<킹스맨>은 원탁의 기사라는 모티브를 통해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집단이세상을 위기에 몰아넣는 '진보적' 악당을 물리친다. 우리는 여기서 극단적 우파(전쟁)를 막기 위해 설립된 진보적 형태(분권)의 '보수적 일원(정치인, 군인)'으로부터 고뇌하는 '진보적 대표(대통령)'와, 극단적 좌파(발렌타인)를 막기 위해 설립된 보수적 형태(원탁의 기사)의 '진보적 일원(킹스맨일원)'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보수적 대표(아서)'의 대비를 통해 현대 사회의 변화를 알 수 있다. 보수를 막기 위해 진보적으로 되었던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진보를막기 위해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이렇듯 <킹스맨>은 최근의 우경화 되어가는 전 세계적 동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작된 <킹스맨>은 극우화에 대한 반발심리를 담고 있다. 주인공 '에그시'는 양아치에서 일종의 귀족 집단(원탁의 기사의 일원)인 '킹스맨'이 되고, 이후 2편에서는 여자친구인 '틸다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왕족이 된다. 이것은 일종의 성공신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로써 '에그시'라는 인물은 전세계 하층민들의 꿈을 대변하는 인물이 된다.

동시에 '귀족'이자 '왕족'인 캐릭터가 '킹스맨'이라는 직책을 맡아 사람들의 평화를 지켜내는 것은,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미덕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에그시'라는 캐릭터는 극우화 사회에서 소외되어가는 사람들의 해방구다. 관객은 끝없는 하락의 현실과 소외되는 개인의 모습을, 상승하는 신분과하층민 출신으로써 하층을 보살피는 개인에게 투영한다. 관객들이<킹스맨>이라는 영화를 보며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사실, 관객들 내면에 잠재된 분노와 울분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킹스맨 또한 감시의 사회에서 벗어나기위해 '감시'의 방법을 사용한다. 또한 '킹스맨'과 같은귀족 캐릭터(스파이와 같은 스페셜리스트, 원탁의 기사)가 '귀족(발렌타인, 아서)을 깨부순다. 이러한 점은 결국 '사회를 바꾸는 것은 상류층=귀족'이라는 의식을 관객의 무의식에 심고 만다. 영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만하는 것은 이 지점이다.

브렉시트라는 영국 사회 분열을 반영하듯, 킹스맨 2편은 시작부터 '영국' 신사들인킹스맨들의 본부가 박살 난다. '멀린'과 '갤러해드'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죽은 가운데, 그렇게 박살난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넘어가는 킹스맨들의 모습은 마치 '대영제국'에서 '독립국 아메리카'로 권력이 이양되는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이를 증명하듯, 미국에 도착한 킹스맨들은, 킹스맨이라는 조직이 '스테이츠맨'이라는 미국의 첩보기관과 사촌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진행되는 서사에서 선대 갤러해드인 '해리'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은 뜬금없지만 흥미로운 요소다. 같은 코드네임을 공유하는 두 '갤러해드'의 성향을 분석해보면, 선대 갤러해드 '해리'는보수적 성향(매너와 규율을 중시)의 지혜이고 후대 갤러해드'에그시'는 진보적 성향(최소의통제, 행동의 자유)의 지혜다. 전작에서 보수적 성향의 '해리'가죽자 '에그시'는 그의 시대(코드네임)을 물려받게 되는데, 본작에서'해리'가 살아있던 것으로 밝혀지는 것은 마치 숨겨진 보수적권력이 다시금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관객들은 이 부분에서 권력의 통제(보수 성향의 특징)가 되살아 날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내 '해리'가 기억을 잃은 상태라는 것을 알고는 '껍데기만 남은 보수'를 떠올리며 안도한다. 그러나 작중에서 미국의 '위스키'요원이미국 대통령의 끄나풀인 것을 눈치챈 해리가 그를 총으로 쏴죽이자 에그시가 해리를 향해 미쳤다며 비난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후 이것이 진실로 판명되며 관객들은 보수의 가치가 과거로 퇴행하는 악기능뿐만 아니라 현재를 안전하게 만드는 순기능도 있음을 깨닫는다. 이렇듯 작품은 에그시와 해리가 서로 포옹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진보와 보수는 화해할 수 있다.'라는 점을 시사한다. 상황을 헤쳐나가는 지혜를 통해 말이다. 이를 증명하듯, 작품의 결말에서 코드네임이 헛갈린다는 지적에도 두 사람은 이름을 바꾸지 않는다.

2편의 악당 '포피'는 특정 기한 내에 해독제를 마시지 않으면 사망하는 마약을 전 세계에 유통한다. 작품은 이 마약의 범주에 그저 유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학적인용도로 사용되는 것도 포함함으로써, '마약'이라는 단어에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이며 모든 사람을 처형하는 두테르테 대통령을 비웃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포피'는 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정글 속에 자신만의 낙원을 만들어살고 있다. 정글은 필리핀의 자연을 묘사하며, 정글 속의낙원은 대통령 궁을 떠오르게 한다.

킹스맨 1편에서 '아서'와 '발렌타인'이 사실상 같은 인물이었듯, 킹스맨 2편에서는 '포피'와 '미국 대통령'이 같은 성격을 지닌다. 자신의 목적(돈과 정치)을 위해 선량한 시민들 따위는 내버려 두는 모습이 그렇다. 이것은 현실에서 묘사되는 두테르테-트럼프의 관계를 포피-미국 대통령의 관계로 끌어들인다. 이를 증명하듯 작품에서 포피와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왕국인 '대통령 궁' 바깥에 있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소통하지 않는 권력(독재)의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그러했던 것처럼 포피는 로봇 개를 풀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죽이고, 트럼프 대통령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 대통령'은 정치적 욕심을 위해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을 '분리'하고 '방치'한다. 마약을 공급하는 자와 공급을 차단해야 할 자가 '마약'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써 사용한다. 결국 문제가 어디서 근원(공급)하는지와 어떻게 해결(차단)해야 할지는 뒷전이고, 자신들끼리 테이블을 펼쳐 탁구 게임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에서 '포피'의 먀악은 '통제'로 읽힌다.'포피는' 마약을 통해 미국 대통령과 협상하며 그를 '통제'하고자 한다. 마약 유통을 합법화해달라는 요구와 함께 말이다. 이 통제의 과정이 흥미로운데, 작중에서 드러나는 마약의 역할이란 것이 '의약품'이라는 용도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마약의 '중독'성이 부정적인측면이라면 '치료'성은 긍정적인 측면으로 읽을 수도 있다.

즉, 어느 한 쪽의 특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어서 적절한 '통제'를 통해 그 정도를 조정할 수 있다. '포피'는 이러한 양가적인 점을 이용해 마약으로 사용한 '부정한 사람'과 의약품으로 사용한 '정당한'사람, 또한 기호품으로 즐기거나 호기심에 사용해본 애매한 지점의 사람들까지 모두 '죽음'이라는 하나의 그룹으로 엮는다. 죄의 엄중을 묻지 않고 말이다.

포피에게서 마약이라는 공을 받은 '미국 대통령'은 테이블 너머로 받아친다. 포피가 그러했듯, 아랫사람의 의견을 묵살하며 마약으로 병든 사람들을 거대한 경기장에 밀어 넣는다. 그들은 그곳에서 병에 진행에 따라 파란 흔적(가난)이 나타나고, 조증으로 춤(일탈)을 추며, 마침내 피를 쏟으며 죽고 만다. 그들은 감옥과도 같은 케이지(Cage)에 놓여 대도시의 건물과 같은형태로 쌓여있다. 인간이 아닌 사물, 혹은 죄수들의 형태다. 이러한 케이지가 모여 미국을 상징하는 뉴욕의 모습을 이룬 것은, 미국이라는국가의 자본이 인간을 '대상화'하고 '감금'하는 것을 은유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통제를 불러온 것이 마약과 같이 일탈과 치료를 동반하는 매체라는 점이다. 죽음(마약중독)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마약이 포함된 '의약품'및 기호품 그리고 마약 그 자체에도 손을 대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되면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점은 '통제'라는 현대권력의 공포를 잘 보여준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나타난 과거의 '통제'가 어떠한 방향으로 의견을 강요하는 것이었다면, 현대의 '통제'는 이용자들의 자발적 선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화해

<킹스맨: 골든서클> <킹스맨: 골든서클> 포스터

▲ <킹스맨: 골든서클> <킹스맨: 골든서클> 포스터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독재자 포피를 쳐부수며 통제권을 되찾아 오려는 그들의 여정은 시작부터 지뢰를 밟고 만다. 지뢰는 상대방의 접근을 막기 위해 땅속에 숨겨놓는 무기다. 그래서 포피의 궁 주변에 지뢰가 쭉 깔린 것은 '자신의 이념을 고집하는 독단'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상황을 알 수 없는 불투명성을 뜻하기도 한다. 지뢰는 아군적군을 가리지 않고 폭발하기 때문에 포피도 그곳으로 접근할 수 없고, 결국 안에서나 밖에서나 확실한 내외적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제 자신도 고립되어 있기에 굶어 죽는 것을 방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지뢰는 갈등 그 차체다.

이러한 지뢰를 밟은 킹스맨들의 모습은 화해를 향해가던 도중 맞닥뜨린 위협이다. 그리고 잠깐 지뢰를 얼릴 수있는 스프레이의 존재는 '화해의 분위기'다. 무언가를 얼린다는 개념은 '냉전'을 다시금 떠오르게 하며, 따라서 여태껏 두 갤러해드(이념, 지혜)를 뒤에서 도와주던 멀린은 '약자를보호하는 킹스맨'을 돕는 올바른 의미의 이념, 즉 정의라고볼 수 있다. 여태껏 묵묵히 상반된 두 이념(갤러해드)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던 멀린이, 스프레이를 통해 화해의 가능성을 열고 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시기에 위에서 언급했던 '영웅'의 개념은 여기서 다시 태어난다.

갤러해드를 내부로 진입시키며 지뢰 위에서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를 부르는멀린의 모습은 상당히 우스꽝스럽다. 어떻게 보면 노래의 가사인 "집으로데려다 주오."가 냉전 시대에 타 국가에 파견된 스파이들의 회한처럼 보이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이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속뜻으로는두 진영 간의 갈등이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이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멀린이 갤러해드를 대피시킨 후 자신이 지뢰 위에 서는 장면의 편집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발을 뗀 후 1초 정도 뒤의 상황을 점프 컷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의편집은, 지뢰를 밟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화해의순간은 그토록 갑작스럽게 찾아온다는 뜻이다. 그리고 화해의 순간은 갑자기 찾아오는데, 집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그 집은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이후로 펼쳐지는 전투장면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미덕이다. 사람을 죽이고 무력을 행사해서 목표를 이루라는 것이 아니다. 여태껏 <킹스맨>이 우리를 대신해 통쾌한 복수를 해주었지만, 진영과 진영 간의갈등이 난무하는 시대에 특정한 가치관을 갖기보다는 그것을 지혜롭게 봉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렇지않으면 영화 속에 나오는 '인육 햄버거'처럼 타인의 살을 취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마블과 킹스맨이 공존하는 이 시대는 신묘하다. 마블의 영웅들도 갑갑한 우리 삶을 대신하며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킹스맨과는 다르게 우리를 환상과 희망의 세계에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영웅들이 모두를 구하는 사회, 자유롭게 행동하며 시민에게 영웅으로 비치는 마블의 영웅들은 분명 '몽환'적이다. 우리는 그들을 동경하기에 마블의 세계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꿈속에 대중을 가두어 놓는다면 그저 동경하기만 할 뿐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마블을 보는 동시에 킹스맨을 보고 있다. 무척 양가적인 이것이야말로 갈등의 해소와 유지 사이에 있는'킹스맨의 세계'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선호 시민기자의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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