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영화 <남한산성>이 이슈다. 추석 연휴에 맞춰 개봉한 <남산한성>을 보고 몇몇 정치인들이 현실에 빗대어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내놨는데, 각자가 속한 정치세력이 다른 만큼 해석도 제각각이었다. 

역시나 가장 빨리 영화평을 남긴 건 SNS에 강한 박원순 서울 시장이었다. 박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한산성을 관람했다며 "하염없는 눈물과 함께 끝없는 분노가 치밀었다"고 말했다.

"얼마든지 외교적 노력으로 사전에 전쟁을 예방하고 또한 백성의 도탄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민족의 굴욕과 백성의 도륙을 초래한 자들은 역사 속의 죄인"이라며,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도자들이 잘못된 현실 판단과 무대책의 명분에 사로잡혀 재난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상황도 그만큼 엄중하니 외교적 지혜와 국민적 단결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페이스북

박원순 서울시장의 페이스북 ⓒ 박원순 페이스북 계정 캡처


 홍준표 대표의 페이스북

홍준표 대표의 페이스북 ⓒ 홍준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도 박 시장과 마찬가지로 명분론을 비판했다. "나라의 힘이 약하고 군주가 무능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의 몫이 된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며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고 전란의 참화를 겪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무능과 신하들의 명분론 때문"임을 지적했다. 그는 영화가 "비록 다소 역사의 왜곡은 있지만 북핵 위기에 한국 지도자들이 새겨 봐야한다"고도 덧붙였다.

자유한국당 장제원 의원은 박 시장이나 홍 대표와 달리 명분론 보다는 임금에 대한 비판에 좀 더 무게를 두었다. "예조판서의 명분(척화파)과 이조판서의 실리(주화파)는 모두 조선의 충신"이며, 오히려 "조선의 백성들을 죽음과 고통과 굴욕으로 몰아넣은 자는 명분도 실리도 타이밍도 모두 잃어버리고 어떤 것도 결단하지 못한 무능하고 모호한 임금"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바른정당 하태경 의원은 앞선 이들과 전혀 다른 영화평을 남겼다. "굴욕의 가장 큰 원인은 총체적 국력과 국방력 차이"지만 "상설정보기관만 있었어도 정세 판단의 무능은 없었을 것"이라며 병자호란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정보의 부재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정원 개혁은 찬성하지만 현 정권이 그보다는 MB 잡는데 더 정신이 팔려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역시나 영화평 한 마디에 덧붙여 자신의 색깔을 입혔다.

영화는 영화일 뿐

영화 한 편을 보고 터져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들. 물론 하나의 문학작품을 보고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지금까지 역사를 다뤘던 우리의 영화 중에서 <남한산성>만큼 정치인들이 같은 듯 다른 것 같은 영화평을 내놓는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영화 관람 이후 현실 정치에 빗대어 자신의 말을 하곤 하는데, <남한산성>은 그 평가가 완전히 제각기이다.

예컨대 이전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많은 작품들이 관객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아왔다. 누가 봐도 고 노무현 대통령을 모델로 하였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나 <변호인>은 '웰메이드'인 동시에 '좌파 영화'였고, 영화 <연평해전>이나 <국제시장>은 '자랑스러운 역사물'이자 촌스러운 '국뽕 영화'였다. 진영논리에 따라 영화에 대한 평가가 각기 달랐다.

그런데 영화 <남한산성>은 그렇지 않다. 정치인의 소속에 따라 영화평이 갈라지지 않는다. 물론 진영에 따라 지도자의 무책임에 대한 비판 수준이 다르기는 하나 각자가 생각하는 비극의 근본 원인이나 해결방법, 그리고 그런 역사를 통해서 이 시대가 배워야 할 점이 모두 상이하다.

이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병자호란이 지금 우리 사회에 그대로 대입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북핵과 사드, 미국과 중국 등 현 시국을 떠올렸다고 입을 모으지만, 그것은 비극적 역사에 대한 일종의 데자뷰일 뿐, 21세기 대한민국과 17세기 조선은 상이하다.

 전근대 군주를 지금의 대통령과 비교할 수 있을까?

전근대 군주를 지금의 대통령과 비교할 수 있을까? ⓒ 싸이런픽쳐스


어찌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은 5년 기한의 공화국 대통령이 평생 국사를 책임져야 했던 조선의 임금과 같을 수 있으며,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악을 쓰고 있는 북한이 명을 물리치고 천하를 재패하기 바로 직전인 청과 같을 수 있단 말인가. 혹자들은 현재 대한민국이 당시의 조선처럼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그것은 과한 우려에 가깝다.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위원이 "병자호란의 시대상황을 지금 북핵 위기와 견주는 것은 호사가들의 얘기일 뿐 적절치 않아 보인다"라고 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현실을 되돌아보는 것은 온당한 일이지만, 그것을 100% 현실에 짜 맞추는 것은 오히려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작 이 영화를 봐야 할 사람

 민초에게 가장 중요한 건 생존이다

민초에게 가장 중요한 건 생존이다 ⓒ 싸이런픽쳐스


명에서 청으로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시기에 시대적 조류를 제대로 읽지 못해 오히려 화를 불러들인 못난 선조들의 이야기 <남한산성>. 정치인들은 이 영화를 통해 국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만 내가 정작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은 이는 따로 있으니 바로 북한의 김정은이다.

핵이라는 카드를 들고 전 세계를 상대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북한을 보고 있노라면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떠오른다. 아직도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자랑하는 미국은 천하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극하려는 청의 막강함과 비견할 만한데, 북한은 그런 미국에 맞서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고군분투 중에 있기 때문이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 앞에서 생존을 위해 선택을 해야 하는 북한의 상황.

아마도 북한은 현재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의 경제봉쇄 때문에 내부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다. 물론 겉으로야 과거 왕조 국가 같은 김정은의 1인 독재체제를 보여주고 있지만, 북한의 최고 권력이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면서 계속 약화되어왔던 만큼 병자호란 당시 조선처럼 권력층에 주화파와 척화파의 갈등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의 전쟁을 무릎 쓰고라도 핵무기를 개발하여 생존방법을 찾자는 척화파와 전쟁은 곧 멸망이니 핵무기를 단지 발판으로 삼아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자는 주화파의 대립. 자, 그렇다면 김정은의 선택은?

영화에서는 명과 청, 명분(척화파)과 실리(주화파)의 대립이 주된 장면을 이루지만, 그 기저에 자리한 것은 민중들의 삶이다. 결국 국가란 그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울타리요, 정치란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좀 더 잘 살게 하려는 방편인 만큼 국가의 지도자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국민들의 안전과 생존이어야 한다.

영화 첫머리에 명분을 중요시하는 김상헌이 얼어붙은 송파강에서 길을 안내하던 노인을 죽인 것은 상징적이다. 명분이 민중의 삶을 지킬 수 없다면, 아니 오히려 그것이 민중의 죽음을 감수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정의가 될 수 없다. 결국 민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핵무기를 만지작거리며 생존할 궁리를 찾고 있는 김정은에게 최명길의 명대사를 들려주고자 한다.

"삶이 없는데 대의와 명분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치욕은 견딜 수 있어도 죽음은 견딜 수 없는 것이옵니다. 왕은 백성의 안전과 행복을 지키는 자리옵니다. 백성을 죽음의 길로 이끌지 마시옵소서."

 삶이 있어야 대의와 명분이 있지 않냐는 최명길

삶이 있어야 대의와 명분이 있지 않냐는 최명길 ⓒ 싸이런픽쳐스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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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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