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토토로>의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연 앞의 인간'을 내세우며 공생 아닌 상생을 주장한다. <늑대 아이>의 호소다 마모루는 가족의 가치를 내세우며 협력으로서의 공동체를 보여준다.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극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초속 5cm>의 신카이 마코토는 시간과 공간 사이의 접점을 그 속에서 찾아낸다. 언급된 네 명의 감독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대표한다. 그리고 여기에 한 명을 더 추가해도 좋을 듯하다. 2010년 48세의 나이로 요절한 곤 사토시는 꿈과 현실의 간극을 '게슈탈트'로써 구현한다.

심리학에서 지각과 인식을 일컫는 개념이 '게슈탈트'다. 예를 들면 '나는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하게 식하사고 회사에 출근했다'라는 문장에서 '식사하고'가 잘못 적혀 있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읽으면서 온전히 인식한다. 즉 우리는 개별적인 단어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형태를 본다. 이것을 중점으로 발달시킨 심리학의 분파가 바로 '게슈탈트 심리학'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게슈탈트를 인간의 삶 전반으로 확대 적용한다. 기존의 게슈탈트가 '보고 느끼는 것의 순간'이라면, 게슈탈트 심리학에서의 게슈탈트란 '보고 느끼는 것의 형태'이다. 그래서 게슈탈트 심리학은 병의 치료를 위해 내담자에게 '현재의 형태'를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작품 포스터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작품 포스터 ⓒ 매드하우스


<망상 대리인>(2004)은 두 가지 면에서 특이점이 있다. 첫 번째로, <망상 대리인>은 곤 사토시의 필모그래피에서 유일하게 총 13화의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와 TV는 매체적 특성이 다르기에 이야기의 구성이 다르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마치 단편영화처럼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작품 전반부와 후반부의 구성이 다른데, 정확히 가운데 지점인 7화를 지점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수사' 파트로, 두 명의 형사를 내세워 '소년 배트'라는 퍽치기범이 나타나는 1화부터 소년 배트의 범죄를 흉내 낸 모방범이 잡히는 6화까지 총 7명의 피해자가 등장한다. 7화에서는 모방 범이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8화부터 시작되는 후반부는 '탐색' 파트로 1~6화가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던 것과는 다르게 완전하게 독립된 이야기로 바뀐다.

8화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만난 자살 희망자 세 명이 여정을 떠나는 것을 보여주며, 9화는 어느 아파트의 아주머니들이 소년 배트를 둘러싼 소문을 떠들어 대는 것을 보여준다. 10화는 애니메이션 업계의 사정을 단편적으로 요약한 '메타픽션'적 특성을 지니며, 11화 12화는 지금까지의 여정이 하나로 귀결된다. 즉, 부분 정보를 모아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식이므로 작품 전체가 하나의 게슈탈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망상의 치료, 게슈탈트

내용적인 측면에서 이 작품은 게슈탈트 자체가 아닌, 게슈탈트 심리학에서의 '치료법'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은 '소년 배트'라는 퍽치기범의 연쇄 범행을 추적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피해자들은 모두 '무언가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작품의 제목에 들어간 '망상'이라는 단어부터, 피해자들이 각자 사건에 연류되는 전반부에 걸쳐 나타난다. 그리고 7화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확정된다. 이것이 작품의 주요 주제임에도 작품의 중반부에서 알려지는 것을 보면, 작품은 이러한 주제의식을 우리에게 심어주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작품은 그것(망상)이 밝혀지고 진행되고 처리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슈탈트라는 하나의 인식의 체계(13화에 걸친 작품 전체)에서 벌어지는 사고의 과정, 혹은 작은 씨앗에서 비롯된 개인의 문제가 사회적 현상으로 확대되는 과정이다.

작품의 후반부는 그 과정을 보여준다. 8화는 전혀 연관이 없는 세 사람이 만나 자살 여정을 떠난다. 초등학생 여자아이와 정숙한 노인, 건장한 체격의 성인 남성이다. 작품은 그들이 함께하는 현재와 채팅방에서 나누었던 대화로 과거를 병치시킨다. 그 채팅방에 있지만 여정에 동참하지 않은 인물이 7화에서 자살한 모방범이었음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이 네 명은 각각 사회와 갈등을 겪고 있다. 여자아이는 '왕따'를 당하고 있으며, 정숙한 노인은 '사업'에 이상이 있다. 성인 남성은 '동성애자'이며, 모방 범은 게임에 빠져 '범죄'를 저지르고 만다. 이들은 각각 2화에서 '왕따' 당하는 유우이치, 1화에서 '일'이 안 풀리는 카와즈, 3화에서 '성(性)'을 파는 하루미, 4화에서 돈을 갚기 위해 '도둑질'하는 히루카와와 비슷하다. 따라서 그들의 여정은 단지 세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여정인 것으로 조심스레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들이 겪은 문제는 우리 사회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망상 대리인>에서는 사회적 죽음이 신체적인 죽음으로 연결되고, 소년 배트는 예방 주사처럼 약간의 상처만을 입혀 신체적 죽음을 부르는 사회적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래서 7화에서 자살한 모방 범의 시신으로부터 소년 배트가 나타난 건, 사회적 죽음이 보름달처럼 완벽해질수록 신체적 죽음도 완벽해진다는 맥락으로 읽힌다.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자살을 위해 모인 세 사람이 앉아있다. 마로미 캐릭터가 가방의 형태로 나타난다.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자살을 위해 모인 세 사람이 앉아있다. 마로미 캐릭터가 가방의 형태로 나타난다. ⓒ 김선호


세 사람은 공원에서 만난다. 폐건물로 들어가 연탄과 수면제로 자살하려 하나 마침 그 건물이 철거되며 쫓겨나고 만다. 지하철에 몸을 던지려 하나 누군가 먼저 선수를 쳐 시도하지 못한다. 산에 가 목을 매지만 나무가 부러지고 만다. 연이은 불행에 자살을 미루기로 한 그들, 온천에 가서 휴식을 취하던 중 소년 배트의 공격을 받는다. 죽음을 원하는 그들에게 소년 배트는 구원자이니 호들갑을 떨며 달라붙는다. 이에 식겁한 소년 배트가 도망치고, 다음 날 세 사람은 실망한 채 역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세 사람은 이미 연탄 연기에 질식해 죽은 상태였음이 8화 끝에서 알려진다. 그러니까 소년 배트는 유령 상태의 그들을 보았거나, 혹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환영이다. 전자보단 후자가 가능성이 높으므로 소년 배트는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나타나는 '환영적인 존재'가 된다. 이것은 여태껏 우리가 하던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어주는 동시에, 작품의 후반부가 망상의 '치료'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망상 대리인>과 오프닝

두 번째 특이점이 바로 그 이야기의 구성에 관한 것이다. 영화와는 다르게 TV 애니메이션인 이 작품에는 매화마다 오프닝과 엔딩이 존재한다. 2분 아래를 살짝 맴도는 오프닝은 히로사와 스스무의 기묘한 음악과 함께 컬트적인 느낌을 준다.

한 쇼트에 하나의 인물이 잡히며 차례대로 화면이 바뀐다. 중간에 횡단보도를 샷으로 잡아 등장인물들을 무작위로 바꾸어가며 하나씩 놓고, 행인이나 하늘을 빨리 감기하여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 그리곤 이전처럼 인물들을 차례대로 보여주다가, 마지막에는 지금까지의 인물을 차례대로 페이드아웃하며 '소년 배트'가 다가와 배트를 내리찍는 것을 보여준다. 그 다음, 지구를 배경으로 달에 정장을 입고 서 있는 노인과 푸르른 초원에 배트를 들고 서 있는 소년 배트를 병치시킨다.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오프닝 장면 중 횡단보도에서 등장인물 모두가 모인다.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오프닝 장면 중 횡단보도에서 등장인물 모두가 모인다. ⓒ 매드하우스


이 오프닝은 몹시 괴상하기 짝이 없다. 피해자들부터 노인과 소년배트까지 모두 기괴하게 웃고 있기 때문이다. 산발적으로 떨며 무표정한 미소를 짓는 모습은, 마치 잘못 만들어진 인형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골짜기'를 떠오르게 한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이 서 있는 위치는 정상적인 곳이 아니다. 신발을 벗고 건물 옥상 끝에 걸쳐 있는 여자, 홍수가 나 망가진 폐허에 서 있는 초등학생, 물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여자아이,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중인 남자, 전쟁이 난 듯한 먼지를 뒤로 하고 폐허 위에서 통화중인 남자, 쓰레기 더미 앞에서 실없이 웃는 여자, 반파된 전통가옥 앞에서 웃는 듯한 주부, 핵 구름이 터진 도시를 배경으로 송출탑 꼭대기에 서 있는 남자, 결혼 예식장 테이블 위에 서있는 남루한 차림의 할머니, 알래스카 산맥의 꼭대기에서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남자.

우리가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작품을 접했다고 가정해보자. 일단 작품의 제목이 <망상 대리인>이다. 망상은 사전적으로 '병적으로 생긴 잘못된 판단이나 확신'을 뜻한다. 그러니 작품의 제목을 보면 그것을 대신해주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오프닝에서 차례대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망상'에 빠진 것처럼 실없이 웃는다. 오프닝의 마지막에 그들이 겹쳐지며 소년 배트가 그들 모두를 내려치는 형국이 되니, 결국엔 소년배트가 그들의 망상을 대리해주는 사람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작품의 발단인 1화부터 그대로 드러나며 우리에게 확신을 심어준다. '사기 츠키코'는 '마로미'라는 강아지 캐릭터로 소위 말하는 '초대박'을 친 캐릭터 디자이너다. 성공에 대한 기쁨도 잠시, 차기작에 대한 불안이 엄습해오던 중 소년배트로부터 습격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녀의 증언을 따르면 범인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다가와 구부러진 배트로 사람을 내려친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다. 이러한 범인의 독특성과 유명 디자이너가 그 범인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합쳐져 세상의 동정과 비난을 한몸에 받게 된 츠키코는 잠시나마 차기작에 대한 불안을 내려놓게 된다.

그런데 츠키코가 범죄를 당하기 전, 화면 뒤로 남루한 차림의 할머니가 보인다. 작품은 음악과 함께 할머니를 마치 '츠키코를 해하려는 누군가'로 만들지만 어느 순간 사라진다. 진짜 범인은 소년배트의 모습으로 나타나 츠키코에게 상처를 입힌다. <망상 대리인>의 전반부는 소년배트가 누구인지를 가려내는 것으로 진행되니, 이 할머니는 '소년배트'의 용의 선상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할머니는 오프닝에서 나왔던 인물 중 한 명이다. 결국 1화의 마지막에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건 그 할머니가 소년배트에게 당하게 될 것인지 혹은 왜 츠키코는 오프닝에서 건물 옥상에 걸쳐져 자살할 듯 서 있었느냐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할머니가 용의자인지 피해자인지에 따라 그들 무리에서 일련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츠키코가 회사에서 압박받는 1화의 내용을 떠올려 볼 때 오프닝에서 인물들이 서 있는 장소는 '망상'의 장소가 된다.

즉 오프닝 장면은 꿈(목표)와 현실의 경계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전체적인 상태, '게슈탈트'를 시각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소년배트는 그러한 '망상=게슈탈트'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치료자'인 셈이다.

<망상 대리인>과 엔딩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엔딩에서 마로미를 둘러싼 채 등장인물 모두가 잠들어 있다.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엔딩에서 마로미를 둘러싼 채 등장인물 모두가 잠들어 있다. ⓒ 매드하우스


그리고 엔딩에는 등장인물들이 거대한 '마로미' 인형을 원형을 둘러싼 형태로 숙면을 취하고 있다. 마치 뱀이 자기 꼬리를 무는 형태의 우로보로스를 떠오르게 하며, 편안감을 주는 음악이 흐른다. 카메라는 인물 각각의 모습을 비추며 음악과 함께 인물이 편안한 상태에 있음을 부각한다.

그런데 인물을 각각 비추며 다음 인물로 넘어가기 전마다 인물의 잔상이 수면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양 갈래로 흩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거울에서 보는 '거울상'을 떠오르게 하며, 그것이 양쪽으로 흩어짐을 볼 때 '분열'을 떠오르게 한다. 즉 엔딩 장면에는 세 가지의 모티브가 있다. 첫 번째는 우로보로스, 두 번째는 거울상, 세 번째는 분열이다. 각각 순환, 투사, 붕괴를 뜻한다. 이것은 오프닝에서 말하던 작품의 의의를 확신시킨다.

망상에 빠진다는 것은 잠에 빠진다는 것과 의미가 비슷하며, 그들은 결과적으로 편안해졌다. 망상에 빠진 상태에서 주체의 생각은 사라지고 외부로부터 생각을 주입받게 되며, 잠에 빠진 상태는 그러한 망상을 시각화(꿈)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개인의 망상이 소년배트라는 사회적 '망상'으로 전환되는 것이 하나의 '순환'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순환이 '전체'로서 기능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게슈탈트에서의 '형태'의 의미와도 결부된다. 따라서 작품은 인식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인물을 통해 짚어나가는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인식의 문제란 '투사'와 '붕괴'이다. 작품 내의 인물은 모두 역할 갈등에 있는 상태다. 인간은 살아가며 여러 사회 (가족과 학교에 동시에 속해있는 것처럼)에 속하게 되며, 그때마다 각 사회에서의 역할의 우선순위를 재보게 된다. 만약 회사에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동시에 아들의 운동회가 있다면 난감할 것이다. 작품 속의 인물들도, 우리도 그런 문제를 겪고 있다. 망상 대리인 '소년배트'에게 당한 7명의 피해자는 그러한 갈등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화에서 캐릭터 디자이너 츠키코는 차기작에 대한 압박감, 1화에서 잡지사 기자 카와즈는 손해배상금에 대한 압박감, 2화에서 초등학생 유우이치는 자신이 소년배트로 몰리는 것에 대한 압박감, 3화에서 대학조교 하루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이중인격자(다른 인격 마리아는 창녀다)임을 들킬 것에 대한 압박감, 4화에서 경찰 히루카와는 야쿠자에게 협박당해 상납해야 할 돈에 대한 압박감, 5화에서 가짜 소년배트 마코토는 자신이 구축한 망상의 세계가 붕괴될 것에 대한 압박감, 6화에서 가출 소녀 타에코는 아버지가 자신의 방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놓았다는 것에 대한 압박감.

추가로 소년배트와 관련된 다른 이들에게서도 발견된다. 7화에서 형사 미츠히로는 범인이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압박감, 11화에서 주부 미사에는 남편이 해고되고 병든 자신을 부양하는 것에 대한 압박감, 12화에서 형사 케이이치는 해고된 후 가족 부양과 직업에 대해 동경했던 자신에 대한 압박감.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검거된 소년 배트는 진범을 모방한 것 뿐이었으며, 망상에 빠진 중학생이었을 뿐이다.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검거된 소년 배트는 진범을 모방한 것 뿐이었으며, 망상에 빠진 중학생이었을 뿐이다. ⓒ 매드하우스


작품이 진행될수록 이들 모두가 '소년 배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피해자로 츠키코가 나타난 후, 그것을 가십거리로 생각한 카와즈가 그녀를 쫓아다니다 피해를 본다. 유우이치는 자신이 소년 배트라는 소문이 퍼지자 가정교사인 하루미에게 상담한다. 유우이치는 다른 학생회장 후보인 우시야마가 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의심한다. 두 사람을 폭행한 건 가짜 소년 배트 마코토이며, 그가 유치장에서 자살해 소년 배트 사건을 맡던 형사 케이이치와 미츠히로는 해고된다.

한편 케이이치의 동료이자 친구인 히루카와는 가짜 소년 배트에게 폭행당했으나 상처를 입지 않아 그를 검거해 영웅으로 추양 받는다. 그때 히루카와의 딸 타에코는 아버지가 설치한 몰래카메라를 발견해 집을 뛰쳐나온다. 이후 케이이치의 아내인 미사에에게 소년 배트가 찾아오나 강한 의지로 물리친다.

하지만 이들만이 가지던 소년 배트와의 연관성은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확대되어 사회 전반에 걸친 현상이 된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이것 하나만 기억해두라. 소년 배트와 밀접하게 연관된 위의 인물들은, 모두 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소년 배트는 곧 '망상'의 존재다.

망상의 존재, 마로미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마로미 캐릭터 풍선이 하늘에 떠있다.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마로미 캐릭터 풍선이 하늘에 떠있다. ⓒ 매드하우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이 작품에서 마로미가 어떤 형태로든 각 화마다 한 번씩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1화 2화 7화 12화 13화에서 츠키코가 들고 다니는 인형으로, 3화에서 택시 운전사의 룸미러에 달린 인형으로, 4화에서 지나가던 여자가 입은 티셔츠에서, 6화에서 뽑기 인형 기계에서, 8화에서 세 사람의 가방으로, 9화에서는 마로미 풍선으로, 10화에서는 마로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회사, 11화에서는 마로미 열쇠고리로 나타난다.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마로미는 그 빈도에 있어 소년 배트와 유사성을 띈다. '언제 어디서나' 관찰되고, '확대 재생산'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즉 작품은 소년 배트를 망상의 존재로 설정하는 동시에, 마로미를 소년 배트와 동일성을 띄게 함으로써 마로미를 망상의 존재로 만든다. 10화에서 마로미 애니메이션에서의 마로미의 반복되는 대사 "어서 쉬렴"은 그것을 뒷받침한다.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모방 범은 사진 속에 나타난 이미지를 자신의 모습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모방 범은 사진 속에 나타난 이미지를 자신의 모습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 매드하우스


작품 중 마로미가 나오지 않는 유일한 화는 7화이며, 그 화에서 '게임 속 역할'로 완전하게 빠져든 모방범이 자살한다. 즉 역할 갈등이 없던 유일한 인물은 '긍정의 망상'이 없다. 반대로 '부정의 망상'인 소년 배트에게 시달리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자신의 역할에 대해 확고한 기준이 있다면, 어떠한 형태로든 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모방 범은 '망상 대리인' 소년 배트를 모방해 두 초등학생을 폭행할 수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덕이라는 것으로 역할 갈등을 겪기 마련이므로 그렇다. 즉 자신의 목표를 위해 물도 불도 가리지 않는 사람은 그 자체로 '망상'이 돼버린다. 목적과 당위성 없는 신념이 무서운 건 그 때문이다.

7화의 마지막에 모방범은 '게임 속 역할'을 이어나가지 못해 괴로워하고, 홀연히 찾아온 소년 배트에 의해 살해당한다. 하지만 두 형사가 살해 현장을 목격했을 때 소년 배트가 벽을 통과함으로써 소년 배트는 '현실의 존재'가 아님이 드러난다. 그것은 자살이라는 경찰의 조사로 확정된다.

망상의 붕괴, 게슈탈트

작품의 오프닝과 엔딩은 작품의 에피소드 수만큼 반복된다. 각각의 에피소드를 보며 우리는, 그것이 분명 같은 영상임에도 묘하게 다른 인상을 받는다. 그들은 환하게 웃는데 행복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편하게 자는데 꿈을 꾸는지 악몽을 꾸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인간의 상상, 다시 말해 '망상'을 스크린 위에 구현하는 작업이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가 겪었던, 겪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여겨진다. 엔딩에서 뱀이 꼬리를 무는 우로보로스의 형상은 순환을 뜻하며, 오프닝과 엔딩은 13번의 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13개로 완성된 <망상 대리인>은 우리의 게슈탈트에 왔고, 우리는 14번째 화가 우리의 현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순환의 악몽'에 시달린다. 게슈탈트의 바깥은 이미 해소된 것들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변사 역의 노인은 엔딩 후 다음 화를 예고한다.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변사 역의 노인은 엔딩 후 다음 화를 예고한다. ⓒ 매드하우스


매 화마다 엔딩 끝에 다음 편을 예고하던 노인은 작품 내에서 간간이 아스팔트에 알 수 없는 수식을 그리는 것으로 출현하는데, 7화에서 미츠히로의 꿈에서 나타난 뒤 12화에서 케이이치의 아내 미사에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꿈의 형태로 "남편이 있는 곳으로 데려달라"는 소원을 들어준다. 끝내 작품 중간에 노환으로 사망하지만 사건 종결 직후 미츠히로가 노인의 모습이 되어 뒤를 잇는다.

작품에서 노인은 다음 화를 예고했으니 우리에게 미래를 말해준 셈이 된다. 그것은 곧 13번의 반복동안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알았다는 말이 된다. 그것 이외에도 미츠히로와 미사에에게 꿈의 형태로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노인이 특별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노인은 '순환 밖'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사고의 바깥에서 망상을 방관한다. 그것은 이 작품을 보는 우리이기도 하며, 우리의 자아 밖에 있는 무의식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노인의 뒤를 이어 미츠히로가 변사가 된다.

애니메이션 <망상 대리인>의 한 장면, 노인의 뒤를 이어 미츠히로가 변사가 된다. ⓒ 매드하우스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개인의 심리를 치료하는 방법은 이렇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에서 '지금 현재' 떠오르는 문제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것이다. 해결된 문제는 중심에서 벗어나 무의식 어딘가의 배경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망상과 같은 병리적 현상에 빠지게 될 시 문제의 해결은 어려움을 겪는다. 해결되지 않은 채 배경으로 넘어가거나, 해결되었던 문제가 다시금 중심부로 들어온다.

작품에서는 소년 배트가 등장인물들의 문제를 배경으로 넘겨버린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 소년 배트는 없고 마로미는 더더욱 없다. 말하자면 마로미는 모 보험 회사의 광고에서 언급되는 '걱정인형'이라 말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걱정인형은 걱정을 먹어치우는 해결사가 아니라 걱정을 배경으로 넘기는 회피의 수단일 뿐이다. 문제의 해결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츠키코는 10년 동안 미루어 둔 과업을 성공적으로 해결했고, 당신도 그래야만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하여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곤 사토시 망상 대리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