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제목일까

이름이 길다. 아니, 이상하다. 키리시마는 누구고, 동아리 활동을 왜 그만두었을까. 우리는 영화 제목을 통해 어떠한 것도 알 수 없다. 단지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두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게 그것일까. 이것이 이 영화에 대한 우리의 첫 번째 물음이다.

언제부턴가 일본의 작품들은 길고 이상한 이름을 제목으로 내걸기 시작했다. 평범한 제목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게 일본 문화계의 목소리다. 처음에는 소설로 시작해서 만화 시장에도 여파가 끼쳤다. 그 작품들을 기반으로 한 영화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나 최근 개봉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가 그 예다. 이러한 영화들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당연히 원작 소설이 성공했기에 영화화됐다. 그리고 소설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작품 포스터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작품 포스터 ⓒ (주)씨타마운틴픽쳐스


그대로 따왔다는 건, 그저 관심을 끌기 위한 제목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존처럼 작품이 말하고픈 이야기를 축약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단지 긴 문장이 되었을 뿐이다. 이때, 우리는 그 긴 문장을 어떻게 여겨야 할까. 간결하게 주제를 요약할 능력이 없다는 '부족함'? 혹은 이렇게 해서라도 말해야 한다는 '절박함'?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가 길고 긴 제목에 흥미를 느껴 영화 관람을 시작하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제 역할을 다한 게 아닐까.

그러니까 그러한 일본 작품들은 조금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는 셈이다. 선택받기 위한 긴 제목은, 그저 불필요한 문자의 나열로만 보이지 않아야 했다. 기존처럼 의미전달을 확실하게 하는 동시에, 기존과는 다른 색다름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새로운 시도엔 합당한 이유가 필요한 법이므로 그렇다. 그런 면에서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는 합당한 이유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에 키리시마는 없지만, 키리시마의 주변 인물을 보여주기 위해선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렇다

그렇다. 이 영화는 키리시마가 아니라 키리시마의 주변인을 보여준다. 그들 모두가 키리시마와 친한 건 아니다. 어쩌면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같은 학교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알 수밖에 없다. 키리시마가 너무 잘나서, 유명해서, 그 작은 학교에서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다는 사소한 소식조차 호들갑스럽게 들려온다.

영화에서 키리시마는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만능' 학생이다. 그런데 그런 키리시마가 동아리를 그만둔다니.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은 둘 중 하나다. 키리시마가 삶에 회의를 느낀다. 혹은, 키리시마'도' 삶에 회의를 느낀다. 우리도 그렇지만 영화 속 인물들도 그런 키리시마를 이해할 수 없다. 무엇이든 잘하니 '행복'도 잘할 것으로 생각해서일까. 결국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키리시마에게 도달할 수 없다. 키리시마가 학교도 나오지 않고, 연락도 회피하니 대화도 할 수 없다.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한 장면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한 장면 ⓒ (주)씨타마운틴픽쳐스


여기까지만 보면 행복에 관한 담론으로 보이기도 한다. 키리시마의 재능이 돈이라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돈이 많으면 행복하리라고 여기는데, 키리시마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돈이나 재능 같은 게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셈이 된다. 하지만 작품의 공간이 '학교'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수백 명이 수십 명으로 쪼개진 공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앉아만 있어야 하는 곳이다. 무척 갑갑하기도 할 테고 무척 재밌기도 할 것이다. 으레 그 나이 또래는 '당연히'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학교는 아이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학교는 그런 십 대의 마음이 갇힌 곳이다. 한국에 태어난 우리가 한국 사회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규모가 워낙 작아 사소한 것으로도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비유하자면 회전문과 같다. 계속 같은 자리를 돌아서가 아니다. 회전문의 축에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도달하진 못하기 때문이다. 회전문의 축은 키리시마고, 한 칸마다 주변 인물 하나씩 차 있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도 그렇게 이루어진다. 어느 하나의 힘으로 회전문을 돌리지 못한다. 반면, 돌고 싶지 않아도 뒤에서 밀면 돌아야만 한다. 그들은 키리시마가 동아리를 그만두었다는 파장에 의해 간접적으로 돌게 되고, 돌아야만 한다.

그것뿐이지만 좋아

단지 이야기만 보아선 아이들의 흔한 고민에 불과하다. 남자친구와 연락이 두절된 여자아이, 운동을 잘해 매너리즘에 빠진 남자아이, 이번 년에도 취주악부를 우승 궤도에 올려놓아야 하는 리더, 영화를 찍고 싶지만 벽에 부딪힌 리더. 그 흔한 고민이 하나둘씩 로테이션 되어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을 만든다. 영화부 리더는 취주악부 리더에게 자리를 비켜달라 말한다. 그때, 취주악부 리더는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여자아이를 본다. 그때, 그 여자아이는 매너리즘에 빠진 남자아이와 키리시마를 향해 뛰어간다.

공백으로 존재하는 키리시마의 자리, 있지도 않은 자리로 수건 돌리기 하는 아이들. 그래서 계속 뛸 수밖에 없다. 고민은 반복되고, 자리가 없어 뛰어가고, 지쳐 쓰러지고 만다. 그 수렁이 생기는 순간, 회전문은 더는 회전문이 아니게 된다. 빠져나올 수 없으면 '문'이 아니라 칸막이에 불과하다. 서로 관찰은 가능하나, 손을 뻗치지 못하는 투명한 막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들이 과연 누구에 의해 저지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걸까. 결국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문이라는 건 원래 안으로도 밖으로도 열리기 마련이다. 단지 그게 회전문이라 특정 방향으로 흘러갈 뿐이다.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한 장면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한 장면 ⓒ (주)씨타마운틴픽쳐스


재밌는 건 아이들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속에 있기에 알 수 없다. 그런데 학교라는 장소는 필연적으로 '속'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속'한 곳이고, 아이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니 '속'이다. 그들에게 '겉'은 가정이나 사회이고, 사춘기 아이들은 겉으로부터 일탈하려 한다. 그래서 유독 친구들끼리 뭉치게 된다. 이른바 자발적으로 구심점을 만들어 모이니, 그 에너지가 무척 독특한 것일 수밖에 없다. 사춘기가 아니면 느끼지 못할 에너지, 그러니까 '그 속에 있기에'가 아니라 '그 속에 있을 수밖에 없어서'가 맞다.

하지만 그속에 있다고 해서 전부 보일 것이라는 건, 착각이다. 작은 세계조차, 멀리서는 보이지만 가까이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칠판은 보여도 책상은 보이지 않는다. 옥상은 보여도 운동장은 보이지 않는다. 이른바 원시다. 원시는 보통 볼록 렌즈를 사용해 교정된다. 말하자면 '실제보다 크게 보이는 것으로' 교정된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실제보다 크게 보이지 않아 그 속에 갇힌 것이다.

그들의 장소는 정작 보이지 않는, 바로 서 있는 그곳에 한정된다. 그런데 실제보다 크게 보인다는 건 일종의 '부풀리기'다. 분명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키리시마도 사실 나약한데, 아이들은 그렇게 '부풀려진' 상태를 몰랐었다. 바로 이것이 이들 관계의 모순이다. 그리고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키리시마가 멀리 볼 것으로 생각했던 건 아이들의 착각이었다. 키리시마는 대회를 앞두고 '잠수타고' 만다. 주요 전력이 빠지니 팀에 큰 무리가 간다. 어쩌면 키리시마가 있었어도 질 수도 있던 경기다. 하지만 키리시마가 없으니 키리시마가 없어서 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키리시마가 워낙 완벽하니 키리시마를 욕할 수는 없다. 결국 키리시마를 말리지 못한 주변 사람에게 애꿎은 화풀이 한다. 그렇게 키리시마는 '있지만 없는 것'이 된다. 키리시마는 분명 그곳에 있었고, 그곳에 없어진 지금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이들은 그 영향력을 애써 모른 체 한다. 그리고 그건 키리시마가 너무 부풀려져 있어서다.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한 장면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한 장면 ⓒ (주)씨타마운틴픽쳐스


아이들은 키리시마가 나약한 걸 몰랐는데, 그랬었다면 진작에 문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분명 이 영화엔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이 있다. 그 수렁은 키리시마 자체이거나 키리시마 주변이다. 결국 그 말은 키리시마 '해역'에 조류가 흐르고 있음을 뜻한다. 그 조류는 키리시마의 주변을 '혼탁하게' 하는 주범이다. 아주 가까이에선 왼쪽으로 흐르나, 살짝 떨어지면 오른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가까이선 모르고 멀리서는 보이게 된다. 살짝 떨어져 있을 땐 '오른쪽으로 흐르는 것' 밖을 볼 수 없다. 그 흐름을 파고 들어가야 비로소 키리시마가 보인다. 원시로 인해 흐릿하게 보이지만, 사실 그 흐릿함이 영화에서 키리시마의 위치이기도 하다. 영화의 회전문은 그 방향이 틀어지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스크린도어처럼 작용해, 아이들을 보호하기도 하고 차단하기도 한다.

신화는 키리시마다, 키리시마는 신화다
이 영화에서 키리시마는 모든 아이들의 신화다. 그리고 신화란 속뜻이다. 아이들은 키리시마에게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투영한다. 그건 희망일 수도 있고, 욕망일 수도 있다. 우리도 곧 아이들 중 하나가 되어 무언가를 투영하게 된다. 그래서 키리시마의 공백은 곧, 키리시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기게 된다. 그 공백의 자리가 결핍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다.

그런데 결핍은 영원토록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다. 그게 채워진다면 결핍이 아니라 결여다. 그리고 결핍의 추구는 파국에 이르게 하는 단초다. 그런데 결핍을 추구하지 않으면 외롭고 고독해진다. 키리시마라는 이름의 해역은 그렇게 조류를 만들어낸다. 키리시마 해역 안으로 들어가면 원시 탓에 키리시마가 보이지 않는다. 결핍 안으로 들어가면 원시 탓에 결핍이 보이지 않는다. 그건 끝없는 술래잡기를 뜻한다. 

영화는 하나의 수요일에 벌어지는 여러 인물의 '다른' 수요일을 보여준다. 그때 우리는 앞으로도 이런 방식이 반복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끝없는 목요일, 반복되는 금요일.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점점 짧아지더니, 토요일과 일요일은 훌쩍 지나가 버린다. 그런데 또 월요일은 반복된다. 그 후로 화요일과 수요일이 지나가는데, 마침내 우리는 규칙성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냥 키리시마와 관련된 에피소드만 속속 찾아내 보여줄 뿐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키리시마를 추적하는 듯한 장면 배치는 우리가 키리시마를 궁금해하는 것에 일조한다. 한마디로, 영화 전체가 하나의 로테이션이다. 그 키리시마를 쫓다 보면 어느 순간 빙글빙글 돌아가는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옥상에 키리시마가 있다는데 막상 가 보니 귀신처럼 사라졌다. 그 결핍은 애초에 채워질 수 없었던 것에 불과한 것일까. 학교를 배경으로 했으니 청춘 영화의 '꿈과 희망'을 기대했던 우리는, 청춘 없는 청춘 영화를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키리시마 없는 키리시마 영화다.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한 장면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한 장면 ⓒ (주)씨타마운틴픽쳐스


우리는 이 영화에서 무언가를 애타게 그리워하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 아무 자리에나 연주해도 괜찮다면서 굳이 영화부 아이들에게 옥상을 비켜주지 않는 취주악부 리더는, 그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다른 아이들 무리를 보고 있다. 그 아이들 무리엔 어느 남자아이가 있고, 그 남자아이는 키리시마의 여자친구와 함께 있다. 키리시마의 여자친구는 연락 두절 상태의 키리시마를 그리워하고, 키리시마와 친하던 남자아이는 아무리 연습해도 '연습하지 않아도 뛰어난 자신'보다 못한 선배를 보며 부끄러움에 빠진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기 하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흘러가고 있다.

농구하는 남자아이 무리가 : "우리들 농구 왜 하지? - 키리시마 기다리려고 시작한 거잖아"
키리시마의 여자친구에게 지나가던 여자아이가 : "너 여기서 뭐 해? – 키리시마 기다리고 있어"
동아리 남자아이가 옆의 남자아이에게 : "키리시마가 오늘 온대-정보 출처는?"

사실상 키리시마가 없으면 의미를 잃는 인물들의 행동은, 키리시마가 없으면 무엇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렇다면 그 아이들 자체가 키리시마 전체를 뜻하게 된다. 어차피 키리시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니, 그 공백의 자리가 키리시마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위에서 공백은 곧 결핍이고, 결핍은 키리시마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아이들 삶의 전체가 결핍이다. 그들 삶을 둘러싼 신화가 사라지는 순간이 정말로 거대한 결핍이다.

결국 학교라는 작은 공간, 사회는 키리시마를 신화로 만드는 동시에 결핍으로 만들게 된다. 학교가 아니라 바깥의 사회였다면 키리시마는 그저 작은 구멍에 불과하다. 하지만 키리시마가 있어야만 하는 그곳이 키리시마를 우상으로 만들게 된다. 그런데 키리시마가 우상인 건,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키리시마보다 뛰어난 사람은 바깥 사회에서 널리고 널렸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작은 사회에 한정된 아이들의 시야가 키리시마를 신화로 만든다. 그렇게 키리시마는 아이들의 전체가 된다. 마찬가지로, 그건 가까이 있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영화는 학교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시작되었다.

이 영화는 그래서 멋지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욕망을 향해가기 마련이다. 그 욕망이 인물의 목표이고, 영화의 주제가 된다. 로맨스에서는 사랑이고, 액션에서는 누군가를 구하거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청춘물에서는 나중에 커서 뭐가 될지에 대한 고민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다. 장래희망 조사표를 나누어주는 장면은 있는데, 거두어들이는 장면이 없다. 잘 썼느냐고 묻는 장면도 없다. 단지 서로의 꿈만이 있다.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한 장면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한 장면 ⓒ (주)씨타마운틴픽쳐스


그런데 그 꿈은 회전문처럼 아주 투명하다. 그 꿈이 정말로 자신의 힘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주변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는지, 혹은 자신이 밀고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중심축이 사라졌으니 어떻게든 꿈이 돌아가는 걸 재개해보려 '축'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 가보니 보이지 않고, 멀뚱멀뚱 유리 너머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곳에 정말로 그들의 우상이 있었다. 영화 내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 그 우상은, 남자의 뜨거운 눈물로 대표된다. 그 눈물이 바로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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